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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치 Apr 03. 2020

일상에 쉼표 한 개

어쩌다 마주친 행복


이사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몸이 분주해졌다. 은행을 들락거리고 동네를 구경 다닌다. 

오늘은 강 건너 멀리 있는 동네에 집 구경을 다녀왔다. 입주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파트가 참 깨끗하고 조용하다.


마음이 바쁜 만큼 발걸음도 바빠진다. 아파트 단지를 거닐면서 적당한 위치도 가늠해보고 시장 조사도 하면서 이사 후 어떨지 별점을 매겨본다. 그렇게 한 바퀴를 휙 돌아본 다음엔 부동산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집 좀 알아보러 왔는데요."

조용한 부동산에 손님이 들어서자 시선이 오롯이 모인다. 손놀림이 분주하고 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곳저곳 열심히 알아보는 동안 나는 지도를 보며 동네를 눈으로 훑는다.


"아휴, 다 나가고 없다네요. 요즘 물건이 없어요."라는 소리에 조금은 기운이 빠져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한번 동네로 향한다. 봄날의 햇살에 밝고 깨끗한 동네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그냥 돌아서기가 아쉽다. 이왕 온 거 더 꼼꼼히 둘러보자며 사방으로 난 길을 누빈다.


이렇게 많은 집 중에 내 집 하나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 조금은 서글퍼진다. 구석구석 돌아볼수록 예쁘게 꾸며진 단지가 더욱 흡족해서 안타깝다. 저기 저 모퉁이만 돌면 구경도 끝이다.

아파트와 학교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딱 돌았는데 눈부신 광경이 펼쳐진다.


"우와! 너무 예쁘다!" 


봄기운을 피부로 내려주는 오후 12시 쨍한 햇빛에 아직은 시원함이 섞여있는 살랑한 바람, 그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나무 길이 나타났다. 마치 내가 올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짜잔-하고.

주위엔 아무도 없다. 온전히 내 것이다. 혼자 보는 봄의 절정에 정신이 아찔하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서 즐기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황홀한 기분도 들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이런 장면을 마주칠 거란 예상은 꿈에도 못 했는데 봄을 한 아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마음에서 향긋한 벚꽃 내음이 난다.


그래,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인 것 같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찾아온다. 잠시 쉼표를 만난 것처럼 팍팍한 일상에 행복이 숨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따뜻한 봄날에 예쁜 벚꽃길을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와 시간이 있으니 지금은 아무도 부럽지 않다.


인생 뭐 별거 있나? 이런 게 행복이지.

그렇게 한 걸음씩 일상의 행복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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