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치 Apr 13. 2020

제 이마는 집안 내력입니다만

시대를 잘 만난 이마


한동안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가리고 다니다가 최근에 다시 앞머리를 기르고 있다.

여자들이라면 흔히 겪어봤을 인생 최대의 고민인 '앞머리 내림 VS 앞머리 올림'의 대환장 갈림길을 지나 어느덧 '앞머리 거지존(zone)' 구간에 진입하였다.


앞머리를 기르던 와중에도 이목구비가 흐릿해진 느낌에 다시 자르고 싶었는데 

"언니, 이제 앞머리 잘라도 하나도 안 어려 보여. 상큼할 시기는 지났으니까 차라리 우아하게 길러서 옆으로 넘기고 다녀."라고 말하며 뼈를 때리는 동생의 조언 덕분에 자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두 달 가까이 기르는 중이다.


며칠 전, 코로나 때문에 한 달 넘게 발레를 쉬다가 선생님을 만나 뵈러 학원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며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것 같다는 말을 건네 듣고 앞머리를 기르는 중이라 말씀드렸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의 눈길은 나의 이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회원님 원래 이마가 이렇게 동그랗고 예쁘셨어요?"라는 질문에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네, 어렸을 때부터 짱구였어요. 집안 내력이에요."

"아~ 그러셨구나. 저는 혹시 안 본 사이에 이마에 뭐 맞으신 줄 알았어요."

"전에는 앞머리로 가리고 다녀서 모르셨을 거예요. 저희 엄마도 뭐 맞았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하하하."


혹시나 변명처럼 들릴세라 자꾸만 이마에 손을 갖다 댄다.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다.


"안 그래도 아는 분이 제 이마 보시더니 500만 원 굳어서 좋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이마 수술비가 그렇게 비싸다면서요?"

"그래요? 저는 수술비는 잘 모르겠고 보형물이 그렇게 아프다고 얘기는 들었어요. 듣기로는 가슴 수술이 제일 고통스럽고 그다음이 이마에 보형물 넣는 거래요. 저는 그 얘기 듣고 무서워가지고 주사 맞았잖아요. 호호호"

"아! 선생님 주사 맞으신 거예요? 이마가 참 동그랗고 예뻐요!"


갑자기 고해성사 시간이 된 것만 같아 웃음이 나온다.

우아한 발레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도 편하게 할 만큼 소탈한 성격을 가지셨다. 매력적인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동그랗고 넓은 이마가 세상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 짝꿍은 쉬는 시간 틈틈이 내 이마를 톡 치고(때로는 때리고) 달아나면서 '마빡'이나 '빛나리'라고 부르며 나를 놀려대곤 했다.


처음에는 화도 내고 짜증도 냈다가 나중엔 제 풀에 지쳐 대항하는 걸 포기했던 것 같다.

하도 시달려서 인지 그때의 기억만큼은 매우 선명하다.

이름도 잊지 않는다. ㅅㄱㅇ 이 녀석.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너의 이마를 톡 치고 달아날 수 있는 영광이 나에게도 주어지길 바란다. 어쩌면 내 이마는 그 친구 덕분에 지금 더 봉긋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 이마

집안 내력답게 우리 집 삼남매는 모두 광활한 이마를 가졌다. 우리 이마는 모두 아빠를 닮아있다.


까마득하게 어렸을 때는 성씨의 한자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막연히 크다는 뜻의 '한'자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잠깐 꺼내서 보여주셨던 집안의 시조 할아버지 초상화도 유독 넓은 이마만 눈에 들어와서 내가 그분의 핏줄임을 실감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는 스트레스였던 이마가 시대의 흐름을 잘 탄 덕분에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다니.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일이다.


그나저나 내 이마 때리고 다녔던 녀석, 잘 살고 있니?

늦은 밤 갑자기,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확 밀려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취미 어때요? - 일상 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