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치 Apr 18. 2020

달리기를 내려놓고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이 주는 행복


건강의 중요성을 시간이 흐를수록 절감한다. 아마 미묘하게 시들어가는 내 체력을, 몸의 상태를 스스로 체감해서 일 것이다. 해가 바뀌면서 나이를 먹는 것도, 나이에 따라 몸이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이치도 아직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다.

예전엔 하루 종일 에너지가 넘쳤는데 요즘은 오후 2시가 다가오면 힘없는 눈이 까무룩 감긴다.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큰 대자로 누워 마음 편히 자보고 싶다.


작년 가을,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늘어나는 일에 부쳐 몸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어 기초체력이라도 키워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운동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 끝난 저녁시간에 잠깐 테니스 레슨을 받았는데 주 2회에 20분 수업이 내 운동의 절대적인 필요량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느껴졌다.

어떤 운동을 시작할까 고민하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책의 영향으로) 달리기를 시작했고 나도 이에 호기롭게 동참했던 게 달리기의 시작이었다.


일주일에 주 3회 30분 정도 가볍게 달리는 것을 정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처음 한 달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대체로 잘 나갔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달리기를 하며 바라보는 그림 같은 풍경에 매료되어 다리가 저절로 나아갔다.


달리기를 한 날은 다른 날과 확연히 달랐다. 미친 듯이 피곤했던 오후 2시도 달리기를 한 날은 피곤함을 모르고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갔다. 그 변화 하나 만으로도 내가 달리기를 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면서 달리기는 차츰 나의 발목에 묵직하게 매달린 모래주머니가 되었다.

추운 아침, 이불속이 너무나 포근해 자리를 박차고 튀어 오르는 시간이 엿가락 늘어나듯 점점 늘어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달리기를 혼자 기록하며 지속한다는 것도 참 외로운 일이었다.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있으면 문득문득 혼자라는 외로움이 내 주위를 떠다녔다. 외로움이 나를 잠식하며 쓸쓸함을 더해갔다.

결국 11월 중순을 기점으로 나의 달리기는 겨울잠에 들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의 달리기는 운동 습관으로 만들기엔 방해 요소가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집에서 차로 5~10분 거리 떨어진 호수공원에서 운동하기를 고집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달리기를 하며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학생과 학부모님을 몇 번 마주친 이후로 집 근처에서 운동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는 당연스럽게도 실행 저항력과 마찰력을 높여 출석하는 일 자체가 대단한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로 만들었다.

게다가 평소의 운동량을 고려해볼 때 내가 설정한 달리기의 목표는 너무나 고강도여서 건강을 위해 하지만 괴롭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상황이 그랬으니 달리기를 오래 유지하기 힘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지난 월요일부터 '워크온(Walk On)' 그룹과 함께 매일 걷기를 시작했다.

워크온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독서모임 '리드온(Read On)'에서 파생된, 일종의 가지치기 프로그램이다.


3월의 첫 주 독서모임 선정도서로 <해빗(Habbit)>을 읽고 나서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야겠다는 멤버들의 바람이 투영된 결과였다. 다들 좋은 습관을 갖고 싶어서, 특히 운동하는 습관을 정립하고 싶어 목말라했다.


하지만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습관을 갖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는 믿지 못했지만 환경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믿었다. 함께 한다면 힘든 일도 결국은 해낼 수 있다는 지난 3개월의 경험을 통해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렇게 멤버들이 의기투합하여 매일매일 단톡에 하루 걸음을 인증하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일하는 특성상 별 일 없이 외출하지 않고도 평일 내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살 수 있는 은둔자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 1,000보도 채 찍지 못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건강해지기로 결심했고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하루 목표를 워크온의 최소 걸음인 5,000보로 정했다.


흔한 일상 / 13일부터 산책 시작 / 배지 모으는 중


건강해지는 체력은 예상했지만 걷기에서 얻는 행복은 뜻하지 않은 보상이었다. 그리고 집 나갔던 입맛이 후다닥 되돌아온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었다. (더 열심히 운동하는데 이상하게 살이 오른다.)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온 세상은 겨울의 티를 벗어버리고 그 사이 많이 아름다워져 있었다.

혼자 밤 산책을 나갔던 첫날, 봄밤의 아련한 정취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둑어둑한 사위에 수 없이 박혀있는 도심의 불빛들은 혼몽스럽게 일렁였고, 고고하게 서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은 밤을 밝히는 달빛처럼 신비로웠다. 코 끝을 간질이는 미스김 라일락의 향기가 바람에 행복을 실어 날랐고 기분 좋은 봄의 기운이 내 걸음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그렇게 온전히 주변에 집중해 사방을 둘러보니 내가 사는 곳엔 아름다운 것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을까. 내가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내가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무척 중요한 것들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찮게 여기던 일상은 그 자체가 내 삶의 전부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걷기를 하며 마주한 새벽 공기에도, 아침 햇살에도, 그리고 밤의 어둑함 속에도 일상의 행복은 한결같은 모습을 하고 숨어서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달리기를 했을 때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목표를 채우고 끝내야겠다는 압박에 미처 살피지 못한 풍경들이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고 나서야 내 마음에 오롯이 들어왔다.


이전에는 이런 일상의 아름다움도 공유할 이 하나 없이 그대로 허공에 날려버려야 하는 허무하고도 슬픈 일이었다. 함께 공감하고 나눌 이가 없다는 무력감은 나를 더 외롭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제 내 곁에 있다. 워크온과 함께하는 운동은 허전하고 지쳤던 지난날 나의 마음을 가만히 토닥여준다. 행복하고 즐거운 매일의 기록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건 나의 존재를 새삼 확인받을 수 있는 시간이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더 이상 혼자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 이마는 집안 내력입니다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