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생긴일-1

by autumn
토론토의 중심시가지, 영앤블루어.


길게만 느껴졌던 여행은 어느새 중반으로 치달았고, 영국, 이탈리아를 지나 다시 첫 여행의 시발점이었던 캐나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도착지는 벤쿠버가 아닌 토론토였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은 커피견학, 커피투어였기에 굳이 이번 여행에 토론토는 포함시키지 않아도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장 긴 기간동안 머무르도록 계획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움.'



토론토는 개인적으로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그리고 내가 나고자란 성남이 아닌 도시에서 1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머물렀던 곳은 토론토 뿐이었으니까. 가장 많은 기억이 있고, 가장 깊은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또한 토론토이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좋은 가족과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보호 아래 머물렀던 곳이기도하고.

그 기억속의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속의 어린 내모습을,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캐나다의 가족들을 다시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토론토에 왔다. 눈물의 이별을 한지 7년만에 이렇게.

다시 들어온 토론토의 공항 모습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7년전 새벽 경황없이, 두려움과 설레임에 쌓여 분명히 눈에 다 담지 못하고 지나쳤을 그 공항이었을텐데, 낯이 익다고 느껴지는것은 순전히 토론토를 제2의 고향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던 나의 생각탓이었을까?
하지만 모든것이 다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공항에서 토론토 중심에 있는 호텔까지 도착하는 경로도 지하철이든, 버스든, 한인택시든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그 어떤 긴장감도 느끼지 않았다. 20일이 넘는 기간동안 혼자하는 여행에 느꼈던 긴장감을 조금은 내려놓은채 호텔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보이는 토론토의 풍경들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두눈에 꾹꾹 눌러담으며.


어학연수 내내 허기질때면 가장 자주 방문했었던 추억의 진저(Ginger).


도착한 다음날 가장먼저 향한곳은 추억의 식당 '진저'였다. 토론토의 중심 시가지라고 볼 수 있는 영앤블루어역에서 1분거리면 갈 수 있는 '진저'. 어학연수 기간동안 가장 많이 방문하고 가장많은 음식을 먹었던 곳이 아닌가 한다. 감격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있자니 불현듯 7년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짓게됐다. 어리고도 어렸던, 순진했던 그때의 우리들.
그 기억이 모두 잊혀지기 전에 어디든 기록을 남겨놓자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실행에 옮기고 있지 못했다. 부디 이번엔 꼭 성공하기를.. 그나마 남겨져있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잘 조립해 남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왜 토론토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것이 순식간에, 그리고 큰 계획이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어학연수도 그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결정됐고, 국가와 도시도 유학원 직원의 추천에 의해서 결정이 됐다. 작은 마을보다는 큰 도시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캐나다의 캘거리 같은 소도시보다는 벤쿠버나 토론토, 몬트리올 같은 도시를 후보에 올리게됐고, 그중에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칭해지는 토론토를 최종 목적지로 결정했었다. 겨울방학동안 결정한 일이었고, 아주 단기간 내에 모든것이 이루어져야 했었기에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학원에 의뢰한지 몇일이 지나지않아서 학원과 홈스테이 하우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메일이 도착했고 그곳에는 홈스테이 가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들이 작성한 환영 메세지 또한 담겨있었다. 토론토로 떠나기 전까지는 홍콩에 3박4일 떠났던 여행이 해외 체류 경험의 전부였던 나로써는 그 모든것이 다 실감나지 않는 일들이었다. 정말 비행기를 타러 떠나는 그 날까지도 말이다.



1년여를 머물 여정이었기에 이민가방 두개에 필요한 물건들을 두둑히 챙기고 (전날까지도 빈둥대다가 그날 새벽을 거의 꼴딱 새면서 짐을 챙겼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짐을 챙긴다기보다는 물건들을 가방에 잘 조준해 골인 시키는 과정에 가까웠다고 볼수 있다. )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운전을 하는 내내 가족들은 어색한 대화를 하며 나를 1년간 떠나보낸다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오빠가 군대를 떠날때를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긴 기간 떠나보낸 적 없었던, 특히나 딸을 품안에서 놓아본 적이 없던 부모님이었던지라 그 아련한 마음 또한 낯설고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복잡 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혹여나 비행기를 놓칠까, 길게 늘어선 출국 수속 줄을 서서 서둘러 짐을 부치고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로 향하는 그 몇미터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누구 하나 자칫 잘못하면 눈물 홍수가 쏟아져내릴 판이었기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내 감정과, 대화를 통제해가며 게이트앞에 섰다. 낯선이들 앞에서 보다 오히려 가족들 앞에서 마음을 표출 하는것이 더 어색한 우리네 보편적 한국 가정답게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 무표정함을 얼굴에 장착하고 아빠, 엄마, 오빠를 한번씩 안아주고는 담담하게 돌아서려는 순간,


모든것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의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홍수처럼 쏟아져내렸기 때문. 영영 이별도 아니고 고작 1년여 남짓한 시간인데 무엇이 그렇게도 섭섭했을까. 엄마는 말한마디 잇지 못할정도로 눈물을 쏟아내고있었다. 그러고보니 매번 으르렁대며 싸우던 엄마와 나였지만 알고보면 그 어떤 모녀보다도 오랜시간을 함께 보내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털어놓던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였으니 엄마의 눈물은 당연했던 건지도 모른다. 엄마의 쓸쓸한 마음이 어느새 내게 다가올것만 같아,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나올것만 같아서 얼른 엄마를 다시 한번 안아주고는 아무렇지 않은척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안전지대로 들어선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돌아선 내 얼굴위에서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지나쳐가는 사람들은 내가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끝마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 콧물을 흘리고 걸음도 걷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 쑥쓰럽다, 어색하다는 이유로 울고있는 엄마의 어깨를 오래 토닥이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같이 울어주지도 못하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와 놓고 이렇게 혼자 울고있는 모습이라니. 가족들 앞에서 왜 그렇게도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지 지금도 알수는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사정없이 울고있는데 가장 친한 친구 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국전 마지막 통화라고 생각해서였겠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고, 인터넷으로 화상통화를 활발히 하던 시대도 아니었기때문에 해외에 있는 친구와는 통화를 자주 한다는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한국땅에서의 마지막 통화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흑흑흑 미...밈...민주야. 엉엉"


전화를 받자마자 울고있는 내 목소리에 당황한 친구는 또 친구를 보낸다는 섭섭함에 함께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우리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순진했던 것인지. 겨우 고작 어학연수 가는것 하나에 가족과 친구가 함께 대성통곡을 하다니 말이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어학연수를 떠나는 자식을 위해 눈물을 보이시는 부모님들이 있는지, 친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친구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때도 그래도 밀레니엄 시대였는데. 하하. 생각하면 할수록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그때의 우리 가족도, 나도, 내 친구도.


그렇게 힘들게 비행기에 올라서 12시간 남짓한 비행을 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인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는 그곳에서 과연 나는 1년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어라고는 단어단어로 쪼개서 할수있는 말 뿐인데. 무섭고 답답한 마음에 잠도 오지 않고 긴장한 채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기억만 남아있다.

토론토로 들어가는 과정은 과연 수월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어렸고, 해외 여행에 익숙치 않았던 때라서 경유라던지.. 도착 시간이라던지 하는것을 확인 할 겨를이 없어서 유학원에서 알아서 다 해줬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 유학원에서는 도대체 일을 제대로 처리한 것인지 싶다. 벤쿠버에서 한번 경유하여 캐나다로의 입국심사를 먼저 밟고 토론토로 가야하는 비행 스케쥴이었는데, 짐을 찾아서 다시 토론토행 비행기로 부치고, 이동을 해야했기에 시간이 아주 많이 소요됐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줄도 길고도 길었고, 짐은 이민가방에 담긴 짐 답게 그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내리고 올리고 하는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동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촉박했고, 나와 함께 같은 유학원을 통해 토론토로 향하기로했던 3명은 첩보영화라도 찍는 심정으로 일을 해결해야했다. 자칫 비행기를 놓칠까싶어서 뛰고도 또 뛰었던 기억이 난다.

토론토의 밤거리.


여차저차 토론토에 도착해서는 공항을 나서면서 각자의 홈스테이 하우스로 이동해줄 기사님을 찾고 짧은 만남에 아쉬워하며 이별의 시간을 나눴다. 입국장 밖에서는 여러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친지, 손님들을 기다리며 상기된 표정으로 게이트가 열리는것을 지켜보고있었고, 저 멀리서 나의 이름을 종이에 큼지막하게 써서 들고있는 선한표정의 흑인 아저씨가 서 계셨다. 긴장된 표정으로 토끼눈을 뜨고 다가가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내가 종이속 이름의 주인공임을 눈치채시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나를 맞이해주셨다. 비행은 힘들지 않았느냐, 캐나다에 온것을 환영한다.. 등등의 상투적이었지만 아저씨의 진심이 녹아든 인삿말을 건내시고는 나의 커다란 이민가방을 대신 끌어주시며 차로 안내해주셨다. 온통 긴장감에 휩싸여 17시간 남짓의 여정의 피로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내게 아저씨의 미소는 한순간에 그 긴장을 녹아내려주기 충분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지나 현지 시간으로 새벽1시를 가르키고 있었고, 아저씨는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나와 같이 한국에서 온 남학생보다 나를 먼저 홈스테이 하우스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씀해주셨다. 유학원의 정책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아저씨의 그 배려와 미소는 지금까지도 좋은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기억때문에 토론토가 더 좋은 곳으로 내 마음속에 남겨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약 7개월동안 머물렀던 홈스테이하우스. 늘 학원에서 집으로 향할때 보던 전경은 다시금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길고 긴 여정끝에 나는 홈스테이 하우스에 도착을 했고,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러 버선발로 뛰어나온 바바라와 마틴을 마주하며 나의 토론토에서의 첫 날이 시작되었다. 나를 맞아주는 바바라와 마틴의 환한 미소와, 마지막으로 토론토에서의 행복한 나날들을 기원해주고 떠난 아저씨의 따뜻한 인사에 앞으로의 1년이 내 걱정만큼 힘들고 낯설지만은 않을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결코 틀린것이 아니었음을 토론토에 머무는 순간순간, 그리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며 토론토를 돌아보는 순간에도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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