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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Oct 21. 2019

흔한 사랑이야기-2


흔한 사랑이야기.



어려서부터 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었다. 

운명이라면, 인연이라면 누군가 말해 왔던 것처럼 운명의 빨간 실을 엮어 태어났을 거라고,

아무리 멀어지려고 발버둥을 쳐도 실의 장력에 의해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 있을 거라고.




지금 기억하는 한 나의 첫 번째 사랑은 7살 유치원 시절 현재라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옷매무새는 늘 단정하고 깔끔했다. 무엇을 발랐는지 그 녀석의 머리카락은 한 올도 따로 움직이지 않고 단단하게 옆으로 빗어 올려져 고정되어 있었다.  단정한 머리카락 아래로는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빛을 내뿜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그와 친해지고 싶다고 매일 기도하며 은근히 그의 곁을 어슬렁거렸었다. 



그러고 보면 그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를 그렇게 우아하고 멋지게 꾸며주는, 역시나 바지런하고 단아한 그 녀석의 엄마를 향한 부러움과 동경. 

우리 엄마는 통통한 몸매에 간편한 냉장고바지를 즐겨 입는, 뽀글뽀글 파마를 한, '응답하라 1988'에 나올만한 전형적인 아줌마의 표상이었다. 자신의 겉모습에 관심이 없는 만큼 딸내미의 예쁨에도 관심이 별로 없었다. 매일 내 머리는 하나로 올려 묶은 올림머리. 잔머리가 삐져나오든 아니든 상관이 없는 획일적인 올림머리였다. 가끔은 월요일에 입었던 옷을 화요일에도 입혀 보내는 털털한 엄마였으니 딸의 머리 따위 어떻게 묶든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가슴이 쿵 떨어지는 이성적 사랑을 처음 느껴본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그 녀석을 만났을 때가 아닐까 한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자세한 에피소드들은 많이 기억에서 잊혔지만 숱한 날을 고민하고 잠 못 이루었던 기억만큼은 남아있으니 그 녀석이 내 첫 짝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대부분 소녀들의 첫 짝사랑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 녀석 또한 깔끔하고 잘생긴 모범생이었다. 

그 녀석의 갈색의 생머리는 축구를 할 때면 생그럽게 찰랑거렸고 아침 조회시간에 옆에서 바라본 흰 피부는 햇살을 반사하며 빛을 뿜었다. 테리우스라는 이름은 그 녀석을 위해 존재했다.

게다가 반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있었으니 내 첫 짝사랑이 되어주기엔 그 어떤 점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 반뿐만 아니라 전교적으로도 인기가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단짝 친구였던 우리 셋도 동시에 그를 좋아하게 됐다. 나, 미주, 세정이.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녀석 얘기를 쏟아냈다. 오히려 그 녀석 얘기를 하려고 매일 그렇게도 모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비밀이 그러하듯 혼자 품고 있을 때 보다 셋이 모여 얘기를 할 때면 그 마음이 눈덩이처럼 더 크게 요동치고 불어났다. 그렇게 불어난 마음은 심장 밖으로 터져 나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비밀이라고, 우리끼리만 알자고 가슴속에 꽁꽁 쟁여놓았던 것들을 자꾸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졌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타고 타고 그의 귀로 내 마음이 전해져 들어가기를 바랐다. 

우연을 가장한 수작이랄까. 



우린 경쟁적으로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고 아마 그 녀석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셋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거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특히나 그 녀석은 내 앞에 앉은 세정이의 짝꿍이었으니까, 나와 세정이가 틈만 나면 그를 힐끔거렸으므로 보통 둔한 녀석이 아니라면 백번은 알고도 남았겠지. 




그 녀석의 지속적인 모른 척이 슬슬 답답해져 갔던 우리셋은, 셋이라는 집단의 용기에 힘입어 ‘고백’이라는 모종의 사건을 도모했다. 


더 이상은 이렇게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다. 

가슴앓이는 여기서 그만하자!! 

차이던 거절당하던 우리의 마음을 알게 하자!! 



그렇게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 앞 문구점으로 향했고 그렇게 몇십 분 동안 그곳에 있는 모든 편지지를 다 헤집어 놓고는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가슴에 품고 미주의 집으로 향했다. 




밖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기에 더없이 좋은 분위기가 아닌가. 


우리는 삼각형 모양으로 방바닥에 엎어져서 각자 그 녀석을 향한 고백 편지를 써 내려갔다.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가끔은 서로의 글을 흘끔거려가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오글거림에 방바닥을 몇십 번 구르기를 반복한 끝에 편지를 완성했다. 



여러 번의 장난전화를 하며 외워버린 그 녀석의 전화번호를 힘주어 눌렀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제발.. 부모님이 받지 않게 해 주세요. 그 녀석이 한 번에 받게 해 주세요. 



“ 여보세요.”

그 녀석이었다. 신이시어.


“ 야.. 원숭이. (그 녀석 의 이름은 이승원. 거꾸로 하면 원승이.)

너 나 누군지 알지. 지금 집 앞으로 나와.”


“왜?”


“아.. 그냥 나와. 줄게 있어.”




최대한 쿨 한척하며 통화를 마쳤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으면서도.



해가 뉘엿뉘엿 저문 밖은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전거 옆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우리의 관심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오란다고 그렇게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셋은 누구 하나 먼저 편지를 내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어색한 정적이 몇 분간 흘렀다. 전화기로는 그렇게 당당하게 그를 불러내 놓고 편지 하나 전해주지 못해 쭈뼛거리는 꼴이라니.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때 어디서 샘솟았는지 모를 용기로 내가 편지를 먼저 내밀었다. 그리고는 미주, 세정이도 수줍게 편지를 든 손을 올렸다.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 우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우리가 내민 편지를 하나씩 받아 들었다.



“ 궁금하면 읽어보든가..!”



5.4.3.2.1.


두다다다다다다.  

창피함을 피할 길 없던 우리들은 그가 편지를 받아 듬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내달렸다. 



“우하하하하, 줬어줬어, 악 어떡해!!!”

“깔깔깔. 나 내일 학교 못가 못가!!!!!”

“아 죽을 것 같아!!! “



비를 맞고 뛰면서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으면서도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그는 졸업 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미주, 세정 그 누구에게도. 



하지만 답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그 녀석의 사랑이 되돌려져 오는 것을 기대했다기보다는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는 그 마음, 그 설렘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셋이 나누고, 그 일련의 과정들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셋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애달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셋이 모여 매일 각자의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는 그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셋이라서 더 신났던 짝사랑이었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짝사랑은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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