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스 베이글
내게는 베이글에 관한 특별한 기억이 몇가지 있다. 그중에 하나는 머레이스 베이글에 관한 기억이고 하나는 머레이스 베이글에 관한 기억은 아니지만 뉴욕에 연관되어 있는 기억이다.
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2008년 9월. 2주간의 방문일정이었는데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사이라서 아직 따뜻했던 뉴욕이었지만 어쩐지 내 기억속에는 마지막에 방문했던 겨울의 뉴욕보다 더 차가운 느낌으로 남아있다.
당시엔 무비자로 여행이 불가능하던 때라 비자를 발급 받는 과정에서부터 너무 긴장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혼자서 떠난 여행에 오랜만에 영어를 사용해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는지 뉴욕에 도착한 순간부터 무척이나 경직되어있었다.
도착 첫날엔 이미 도쿄에서 미친듯이 체력을 방전시키고 왔기에 거의 24시간을 민박집 침대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고, 결국 현기증을 동반한 허기짐으로 인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걸어나와 정신없이 먹을 것을 찾아 헤메었다.
심신이 지친눈으로 바라본 뉴욕은 그만큼이나 낯설고 차가웠다. 사람들이 모두 무표정하고 어딜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없었다. 차가운 도시, 정없는 도시라고 느끼며 밥한끼 마음놓고 잘 사먹으러 들어가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모두 내 생각탓이 아니었나싶다. 내가 두려워서 세상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들 또한 나를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을 사용해본적 없던 나는 민박집을 예약할때도 1인실을 예약했고, 그때문에 도미토리를 사용하는 사람들 처럼 같은 여행객을 잘 만나지 못하고 처음 며칠간은 혼자서만 돌아다니고 숙소에서도 혼자 생활해야했다. 며칠 뒤 도미토리 이용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홀로 차가운 뉴욕을 맞이하고 있을때였다. 아침에 서둘러 출발하려고 나오는데 숙소 앞 골목길에 베이글 트럭이 한대 보였다. (뉴욕에서는 우리나라의 토스트나 김밥 트럭처럼 여기저기에 베이글과 샌드위치를 파는 트럭을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속을 채우고도 싶었고 늘 말로만 듣던 뉴욕의 베이글을 경험해보고도싶어서 망설임 없이 트럭 앞으로 향했다. 풍채가 좋으신, 멕시코나 남미쪽에서 오신듯한 아저씨가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아저씨의 환한 미소를 마주하고는 긴장감을 풀고 작은 목소리로 베이글과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부쩍 추워진 아침 바람을 맞으며 발을 동동대는데 드디어 나의 커피와 베이글이 나왔다.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너도 알고있지? 오늘 너의 하루가 정말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방금 너로인해 나의 하루도 멋있어졌으니까."
라고 말하며 베이글과 커피를 건네주었다.
의기소침해진 나의 심정을 아는 듯 푸근한 미소와 함께 위로가 전해지는 그 말들을 전해줌에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졌는지. 겨우 5불도 안하는 금액에 사먹었던 베이글과 커피였지만 내게는 여태껏 먹었던 그 어떤 베이글보다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후에 그 경험을 뉴욕 유학생활을 했던 언니에게 털어놓으니 언니는 웃으면서 자신이 가장 뉴욕이 그리울때가 아침에 학교로 향하는 길에 사먹는 트럭의 커피와 베이글이 생각날때라고, 그 베이글야말로 뉴욕을 대표하는 베이글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두번째 기억은 머레이스 베이글(Murray's Bagels)에서의 일인데, 이 기억은 조금 부끄럽기도하고, 떠올리면 슬며시 미소짓게 되기도 한다. 이것도 2008년도의 일인데, 구입했던 책자에 뉴욕 최고의 베이글 가게로 머레이스 베이글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미 뉴욕은 워낙 베이글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 일정중에 포함시켜 놓았는데 여기서도 역시 주문이 문제였다. 1년의 어학연수 후에도 여전히 토론토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울렁증을 겪던 나였던지라 머레이스 베이글까지 당당히 찾아갔으면서도 주문하기 전에는 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줄을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고있자니 주문하는 순서가 꽤나 길고 까다로운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나이도 먹었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시스템이 많기때문에 전혀 긴장하지 않지만 20대였던 그때는 사소한 일에도 얼마나 덜덜 떨어댔는지 모른다.
주문방식은 대강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와 비슷했다. 처음에 여러 종류의 베이글중에 ( 화이트, 위트, 세사미...등등) 먹고싶은 베이글을 고르고 안에 들어갈 크림치즈 종류나 야채, 피클, 계란, 햄, 등등등의 재료를 골라야했는데, 우리나라의 베이글 가게에서처럼 크림치즈가 한두종류만 있는것이 아니라 크림치즈와 야채류만 보아도 수십가지는 되어보였다. 줄이 줄어들고, 내 순서가 다가올수록 내 심장은 터질 것 처럼 뛰기 시작했다.
'아아.. 빵은 뭘 시키지, 과연 이건 발음이 어떻게 해야 맞는걸까? 처음에 시작은 can I가 좋을까 May I가 좋을까 Would you plz가 좋을까..? 크림치즈만 발라야되나? 피클도 넣나? 피클하고 연어를 같이 넣어볼까? 대체 어떤 조합이 여기 대표 조합이지...? 아아 어쩌면좋아.'
가까스로 빵을 고르고 소스의 조합을 생각하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때 직원이 마침내 내게 물었다.
"안에 어떤 걸 넣어줄까?"
"어....어... 그게...그게... 크림치즈랑... 연어랑... 피클이랑... 토마토...!!"
마음속에서는 '우쥬 플리즈 서제스트 미 더 퍼펙트 컴비네이션.....??'이라고 콩글리쉬를 외치고 있었지만 내 입에서는 닥치는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넣어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발 그것들이 괴상한 조합만 아니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고....
"what? Do you really want that? ( 너 정말 저렇게 넣어달라고????)"
얼굴을 구기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저씨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결국..이상한 조합이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뭐라 설명할수도 없이 워낙 빨리 빨리를 외치며 뒤에 사람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기다리던 상황 이었기에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나의 머레이 베이글에서의 스트레인지 했던 첫 주문이 끝이났다. 비록 아저씨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받아든 나의 베이글은 썩 맛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트레인지 베이글을 맛있게 냠냠 먹던 나를 그 직원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부끄럽기도 했지만 긴장감 넘치던 그 주문을 완료한 나는 그렇게 홀가분 할 수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매장에 앉아 사람구경도 하고 사진 정리도하며 맛있게 스트레인지 베이글을 먹어치웠다.
그때의 순진했던 나를 기억하면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다시 방문한 머레이스 베이글에서의 내 베이글. 더이상 스트레인지 하지 않다구! ㅎㅎ
그때의 내 모습을 추억하며 5년뒤 다시 뉴욕을 갔을때도 머레이스 베이글에 들렀다. 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에 감격이 밀려왔다. 더이상 주문하는 것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았던 나는, 그리고 주문 시스템에도 익숙해져 있던 나는 담담히 베이글을 고르고 크림치즈까지 선택하며 여유롭게 주문을 마쳤다. 나의 생각이 여유로워서 그런것인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그랬는지 직원들의 표정,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표정 모두가 여유롭고 밝아보였다. 다시 맛본 베이글의 맛은 꿀맛 그 이상이었다.
추억의 맛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