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이 시대의 잡부가 되어버린 40대의 소개
"안방님은 어떤 직무를 담당하고 계셔요?"
"으음, 브랜드 마케터라고 봐야겠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께는 나의 직무를 브랜드 마케터라고 얼버무리는 편이다.
사실 맞다. 내 커리어 중에 가장 긴 기간은 브랜드 마케터였다.
하지만 내가 나를 브랜드 마케터라고 정의하길 주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브랜드 마케터와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들 때문이다.
대부분 브랜드 마케터라고 하면,
맥북을 들고, 아이폰을 쓰고,
프라이탁 지갑 같은 것이 주머니에서 발견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철학에 대해 쉼 없이 얘기할 수 있고,
뭔가 신경 쓴 것 같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조금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엑셀(의 함수와 자동화된 결과)을 좋아하고, 갤럭시를 쓰고,
늘 같은 패딩 조끼를 걸치고
좋아하는 브랜드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어떤 대표님께서는 나를 만난 후에
"내가 봤던 브랜드 마케터 중에서 제일 평범해 보여."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하튼 나는 나를 브랜드 마케터로 소개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너드는 아닌) 평범한 공대생에 가깝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정의하는지는 내가 살아온 궤적과도 꽤나 큰 연관이 있다.
대략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그나마 제일기획부터가 마케터에 근접한 커리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대 졸업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 전략컨설팅학회)
개발자 (3년, 병역특례)
축구 선수 에이전트 (~1년)
제일기획 (6년, BTL 이벤트 마케터 / BTL 카피라이터 / 전략팀 매니저)
컬리 (2.5년, 브랜드마케팅(BM)팀 리더)
버킷플레이스(오늘의집) (4년+,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 리더 / 크리에이터팀 + CNB기획팀 리더)
언뜻 보면
"브랜드 마케터 커리어네."라고 할 수 있긴 한데,
실제로 브랜드 마케터로 일한 건 15년이 넘는 기간 중에 6년 남짓이긴 하다.
(나는 컬리에 가기 전 제일기획에서는 단 하나의 TVC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를 인간적 특성을 정의하는 본질은 공대와 개발자에 좀 더 가까운 편인데
브랜드에 관련된 일을 잠깐 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그냥 재밌어보이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커리어 골(Goal)이라는 걸 정해놓고
이를 위한 커리어 여정을 관리하기도 하는데
나는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결정해야 되는 시점에 (이직, 팀 이동 등등)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일을 선택했을 뿐이다.
(지도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길, 졸업생 중에 첫 직장이 광고대행사인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었다.)
이러다보니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과는 꽤 다른 시도들을 많이 해왔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숫자에 집착하는 브랜드 마케터가 된다거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산을 절감시키거나)
실타래처럼 꼬인 커리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그래도 십몇 년 일했는데, 이렇게 직무를 바꿔가면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은 노하우는 있을 테니까.
혹시나 보시는 분들도 꽤 도움이 될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