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간즘> New Work로 가는 길
대학교 4학년 때 벤처창업론 수업 때 현업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Y교수님의 첫 수업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 보드에 <정리정돈> 한자를 쓰시고, 따뜻한 시선과 말로 아래와 같이 강의를 시작하셨다.
"여러분들이 벤처창업론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창업을 꿈꾸는 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번 과목에서 배우는 내용은 아직은 좀 먼 얘기예요. 그런데 제가 창업을 하고 사업을 하다 보니 의외로 중요한 부분은 거창한 사업모델, 이론 그리고 아이디어가 아니더라고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도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꼭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거예요. 여러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정리정돈은 기본입니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정리정돈에 탁월해야 하고요."
당시 Y교수님 말씀에 '나는 좋은 말씀이구나' 하는 차원으로 이해하고는 바로 잊었던 것 같다. 그런데 조직 생활을 해 보니 이 말씀이 얼마나 일에 대한 핵심이었나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15년 조직 생활을 통해 정리정돈과 역량이 크게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어느 조직이던 일 잘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 조직의 인재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특성은 일을 추진하는 인프라에 대한 정리정돈과 일의 프로세스 속에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내가 일하면서 경험한 크게 3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 업무를 위한 파일 정리와 카테고리, 폴더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그 직원이 거쳐간 파일과 폴더는 누가 봐도 빠르게 이해하기 쉬운 구조와 파일명으로 정리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그 직원이 관리하던 인트라넷 폴더에는 업무마다 연계된 파일에 불필요한 중복이 없고, 업데이트가 잘 되어 있다. 데드라인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 파일들도 종료된 버전까지의 관리가 되어 있다. 이는 업무의 시작과 끝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업무상 반드시 있어야 할 파일은 누구나 찾기 쉬운 구조에 반드시 있다.
- 바탕화면이 깨끗하다. 업무 중 문제가 있어 찾아오는 직원들의 랩탑을 보면, 그 직원 마음처럼 바탕화면이 꽉 차 있고 복잡하다. 꼭 그런 건 아닌데, 대부분 비슷한 상황을 만났다. 나에게 설명하기 위해 파일을 찾는데도 바탕화면에 그 파일이 있는지, 다른 저장 위치에 있는지 헤맨다. 이런 직원의 경우 업무 하다가 연계된 파일을 실수로 삭제하거나 저장을 제대로 못해 날려먹기 일쑤다. 일 잘하는 직원은 랩탑의 바탕화면부터 깨끗하다. 본인의 업무 카테고리에 파일들을 실시간으로 정리하므로 바탕화면에 파일들이 쌓일 상황이 없는 것이다.
- 업무 주변 환경이 깔끔하다. 업무를 하다 보면 업무 효율화를 위해서 필요한 사무용품이나 전자제품들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내가 일하는 일터는 스마트 오피스여서 카페처럼 틔여진 공간이고, 지정석이 없다. 그래서 직원들은 업무 진행 시 본인들의 랩탑을 중심으로 키보드나 별도의 모니터, 음료, 다과 등을 놓는다. 여름에는 미니 선풍기, 겨울에는 미니 가습기도 추가된다. 곰곰이 살펴보니, 정리정돈을 잘하는 직원은 배치한 물품을 수시로 정리한다. 그리고 배치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퇴근 시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퇴근한다. 반면 빈번히 업무가 밀리는 직원의 책상은 여러 개의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과자봉지, 여러 물품들로 가득하다. 더구나 퇴근한 자리를 가보면 무언가 치워야 할 것이 하나씩 남겨져 있고,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 자리 정리정돈은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민감하게 본 부분은 정리정돈의 태도가 훈련으로 향상될 수는 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례로 신입 때부터 정리정돈에 지적을 받아온 한 직원은 팀을 이끄는 팀장이 되어서도 이게 잘 안되어 무지 애를 먹었다. 혼자 일할 때는 실수해도 덮어가며 일할 수 있겠지만 팀의 리더가 되면 상황이 다르다. 팀의 리더가 업무 연계된 정리정돈이 안되는데, 어떻게 가이드를 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중간즘에서 보니, 정리정돈은 삶의 방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준다. 일을 통해서 배운 정리정돈의 습관들은 내 차를 타는 사람들이 좋은 기분을 가지게 하고, 삶의 중요한 공간을 가족들의 희망에 맞도록 적절한 정리를 하게 해 준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정리정돈을 실행하는 습관이 배어있다. 정리정돈의 습관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생활 속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의 선배이자 경영자 입장에서 Y교수님은 당시 우리들을 자식처럼 바라보시며 얘기하신 것 같다. 사십 대 중반, 이제야 Y교수님의 가르침을 조금 이해하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