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시작하는 인생 2막
"내일 악어봉에 갈까?"
폭염이 끝나고 서늘한 가을 하늘이 펼쳐지자, 아내가 부부산악회 일정을 통보한다.
"어? 그러지."
나는 결정에 순순히 따른다.
"그럼 빠네렌토에 가서 샌드위치 좀 사와, 내일 아침 가면서 먹게."
빠네렌토는 빵집인데, 세 정거장 정도 걸어가야 한다. 나는 군말 없이 빵을 사 온다.
아침 일찍, 아내는 커피를 내리고 과일이며 떡 같은 먹을거리를 배낭에 챙긴다. 나는 산행 준비를 마치고 배낭들을 현관 앞까지 옮겨놓고 아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운전은 내가 한다. 옆에서 아내가 챙겨주는 커피를 마시며, 아침 일찍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우리 '부부산악회'에서는 첫가을 산행으로 충주호 부근 악어봉과 옥순봉을 다녀왔다. 여기서 부부산악회란 아내가 산악회 대장, 남편은 부원을 담당한다. 산악회는 내가 은퇴하면서 결성되었다. 우리 둘 다 조용하고 사람 많은 곳을 피하는 성격이라, 버스 산악회나 일반 산악회에 참가하지 않는다. 대신, 자차를 이용해 날씨 좋고 한적한 평일을 골라 당일 산행을 즐긴다. 국립공원의 명산을 평일에 한가롭게 다닐 수 있다는 건 백수가 누리는 큰 축복이다. 산행 중에도 우리 부부산악회는 조용하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조용히 산길을 걷는다.
맨발 걷기와 산행은 아내와 내가 공통으로 즐기는 유일한 취미다. 이는 나에게 생명줄과도 같다. 우리 부부 산악회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원이 지켜야 할 수칙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산악회가 언제 어느 산을 갈지는 대장이 정한다. 부원은 이 결정에 토를 달지 않고 따른다.
먹을 거 준비는 대장이 하지만, 부원은 나머지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대장이 나올 때까지 대기한다.
산행 시 부원은 결코 지쳐서 뒤에 처지면 안 된다. 대장은 힘들어하는 부원은 버리고 갈 수 있다. 따라서 부원은 평소 체력 관리를 잘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산행 꾼처럼 등산에 능할 필요는 없다. 대장보다만 잘하면 된다. 대장이 "등산 가자" 하면 언제든지 흔쾌히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부원은 정상에 올랐을 때나 조망이 좋은 전망대에 오르면, 오길 잘했다는 멘트를 날려야 한다. 준비해 온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행복한 모습을 가득 표현해야 한다.
부원은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대장의 사진을 정성스럽고도 많이 찍어야 한다. 대장은 음식점이나 카페에 가면 부원이 올려놓은 휴대전화에서 다량의 사진을 카톡으로 퍼간다. 다음 날 대장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부원이 찍은 걸로 바뀐 걸 확인하면, 부원은 마치 사진작가가 작품 하나를 판매한 것처럼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번에 다녀온 악어봉은 900m만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는 귀엽게 머리를 내민 악어들을 볼 수 있다. 가을 악어들을 찍기 위해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온 사람들이 많다.
다음에는 옥순봉을 오른다. 옥순봉은 높이 286m로 가는 길이 트래킹 코스 같다.
오전에 두 개의 봉우리 산행을 마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악어섬'이라는 음식점에서 막국수를 먹고 오늘 산행 일정을 마무리한다.
부부산악회 다음 일정은 다음 주 월요일이라고 한다. 어디로 갈지는 대장만이 알고 있다.
우리는 조용한 부부산악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