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허 <뱀 선생> 배우 박용수의 목소리로 듣고
오디오북 속에서 흘러나오는 배우 박용수의 담담하고도 서늘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문득 멈칫했다.
라이허의 《뱀 선생》. 그의 낭독은 1920년대 대만의 눅눅한 공기를 현재로 불러왔고, 그 속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뱀 선생의 인물상을 지독하리만치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이 이야기는 식민지 대만의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2026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본주의 시장과 겹쳐 보인다. 소설 속 기묘한 먹이사슬 —뱀, 개구리, 지네—은 한 시대의 구조이자 인간 조건의 지도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여기서 뱀은 곧 법이다. 공식적인 질서이자 권위이며, 언제나 유익하고 귀하다는 얼굴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담담한 낭독이 스며든 문장은 묻는다. 그 법은 실제로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경찰직무집행법을 비꼬는 대목에서 드러나듯, 법은 추상적으로는 정의롭지만 현실에서는 힘 있는 쪽의 논리를 더 매끄럽게 통과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개구리(민중)는 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었다. 그들이 기댄 것은 뱀 선생의 비방(秘方), 곧 제도 밖의 서글픈 선택지였다.
과학이 약재의 성분을 분석하느라 1년 10개월을 보내는 동안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민중에게 필요했던 것은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 당장의 숨통을 틔워줄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낭독으로 구현된 뱀 선생은 거대한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는 대단한 재물을 모은 자도, 치밀한 악인도 아닌, 그저 시대의 틈새를 흐르는 초라한 생존자였다.
그는 안다. 자신의 비방이 실체가 없다는 것, 양의의 의술이 더 정확하다는 것. 그럼에도 법은 정의를 말하며 비용을 요구하고, 의술은 치료를 말하며 대가를 전제로 한다. 그 틈새에서 위로와 설명을 동시에 주는 얼굴로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뱀 선생이다. 그를 만든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채 원칙과 실익만을 따지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사리를 아는 사람은 정말 적다오”
소설의 마지막 즈음, 뱀 선생은 양의에게 말한다. “사리를 아는 사람은 정말 적다오.” 이 말은 과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왜 사람들이 진실보다 위안을 먼저 찾는지, 제도가 옳아도 삶에서 체감되지 않으면 왜 외면당하는지를 이해해 버린 자의 쓸쓸한 고백이다.
사리는 지식의 양이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꿰뚫어 본 뒤에도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아는 자의 통찰이다. 법이 정의의 탈을 쓴 채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인간은 옳은 것보다 견딜 수 있는 것을 먼저 붙든다는 사실.
그 불편한 진실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자리, 거기에 사리가 있다.
오늘의 주식시장도 다르지 않다. 차가운 공시와 법적 공방 속에서 개인은 늘 외롭다. 그 틈을 파고드는 리딩방의 ‘비방’에 우리는 어렴풋한 의심을 품으면서도 손을 뻗는다. 진실을 이해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통이 따르기에, 가끔은 진실 대신 안정을 택하는 것이다.
사리를 아는 사람은 여전히 적고, 뱀 선생이 필요해지는 순간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용수의 목소리로 다시 살아난 뱀 선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비방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느냐고.
We seek comfort when the truth is too cold to embrace.(26.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