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비나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비가 그치고 남은 길은 아직 젖어있고, 사람들의 발자국도 미끄러진다. 그 비가 내린 이유가 있었던 걸까? 혹시 우리가 지나쳐온 자리가 너무 많이 흠집 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나는 비가 오면 집 앞에서 창문을 열고 손끝으로 물방울을 세어 보았다. 한두 개, 세 개... 그 작은 물방울들이 손끝에서 굴러 떨어지며, 어쩌면 내 마음속의 오래된 상처도 하나씩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 마음 속의 비나리처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지지 않을 힘을 얻게 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비나리는, 그저 비가 내린 후의 상처를 덮어주는 일시적인 시간일까? 아니면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맑고 깨끗해질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일까?
비나리, 그 이름은 정말 이상하다. 비와 나리가 결합되어 있다는 그 말 속에서 나는 어떤 구속이 느껴진다. 나리, 그것은 '이름'이기도 하고, '결국 이겨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와 나리, 그런 두 단어가 한데 얽히면서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비가 그치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는 사실.
가끔씩,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곳에도 비가 내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비 속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비가 내리도록 허락했던 시간들 덕분이었다.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의 비가 내려야만 그것이 깨끗해지듯이, 내 안의 상처도 그 비 속에서 조금씩 치유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비나리 속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만날 수 있었을까.
비나리는 또한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여정을 말하는 듯하다. 비가 내리는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멈추고 난 후에는 세상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우리도 일상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감추려 하지만, 결국 그 상처들이 말해주는 진실은 다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었느냐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나면 땅은 깊은 숨을 쉬며, 그 숨결 속에서 다시 살아나려는 힘을 얻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겪는 아픔, 상처,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후에는 새로운 시작이 찾아온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힘이 바로 비나리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비나리, 결국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 아닐까? 비가 그치고 나면 새로운 햇살이 비추듯, 내가 지나온 길이 아무리 비에 젖어 있어도 결국엔 그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리처럼 끝까지 버티며 걸어가면, 그 길 끝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