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지나면 더 이상 그 봄은 없다고 믿었던 날이 있었다. 사람들은 계절을 날씨로만 생각하지만, 나는 계절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간과 마음이라고 느낀다. 그해 봄, 산수유가 유난히 빨리 졌다. 여름은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고, 가을이 오기도 전에 겨울의 차가움이 먼저 찾아왔다.
스무 살의 겨울은 느리게 지나갔다. 나는 옥탑방에 살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바람은 뺨을 얼게 했고, 낡은 전기장판은 온기를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 방은 좁고 낡았지만, 그래도 내겐 하나뿐인 집이었다. 밤이면 무릎을 감싸 안고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때의 나는 자주 외로움과 싸웠다. 어쩌면 나는 계절이 아니라 그 속에 놓인 나 자신과 싸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겨울에도 봄은 있었다. 어느 날, 같이 살던 형이 작은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커피 속엔 설탕이 잔뜩 들어 있었고, 형은 “이거 먹고 힘내라”는 말 대신, “너, 잘 버티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그날은 그 말이 꼭 내 마음 속에 피어난 꽃 같았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겨울 속에서도 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형의 말 한마디가 내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줄 몰랐다. 그 후로 나는, 아주 작은 변화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아침에 비추던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따뜻한 전기장판의 열기 같은 것들. 그것들이 내 겨울을 지켜줬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젠가 지나갈지 몰라도, 내 안에는 그 순간들이 여전히 계절처럼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더 많은 겨울을 겪었고, 더 많은 봄을 보냈다. 그 속에서 많은 걸 잃고 또 얻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계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단지 형태를 바꿔 우리의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다. 그해 겨울의 형의 말처럼, 한 번 우리에게 뿌리내린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는다.
이제 나는 안다. 누군가에게 계절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건네는 말 한마디, 작은 손길, 또는 그냥 함께 있어주는 시간이 얼마나 큰 계절이 되는지를.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계절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계절은 단순히 날씨의 순환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 스며 있는 것들이다. 서로의 온기와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사라지지 않는 흔적들이다. 가장 추운 겨울에도 봄은 있었다. 가장 더운 여름에도 바람은 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삶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봄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계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온기와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그 계절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