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모든 것을 덮는다. 눈이 대지 위에 앉으면 세상의 소음이 잠잠해지고, 바람은 차갑게 골목을 가로지른다. 하지만 쌓이는 것은 눈뿐만이 아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의 숨결, 떠나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다 잊었다고 믿었던 추억까지 함께 쌓여간다. 한 겹, 또 한 겹. 마치 그리움도 겨울과 함께 두터워지는 것 같다.
겨울은 단순히 추운 계절이 아니다. 떠난 것들과 남은 것들 사이의 경계에 우리를 세운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마다 발끝으로 잊으려 했던 기억들을 스친다. 마치 발밑에 묻힌 추억이 나를 불러세우는 듯하다. 그 기억들은 종종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날, 차가운 거리에서 놓쳤던 손. 그 손이 내게 남긴 마지막 온도.
어느 겨울, 두 손을 맞잡고 걷던 날이 떠오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충분했다. 서로의 온기만으로도 온 세상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겨울은 언제나 오래 머물러주지 않는다. 계절처럼, 온기도 결국 떠나갔다. 뒤돌아보면 사랑은 늘 그렇게, 조용히 우리 곁에서 멀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랑은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찾아가는 것이라지만, 떠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년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그 길목에서 멈춰 선다. 쌓이는 눈은 녹고, 바람은 차갑게 스쳐가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다. 마치 계절은 돌아와도 내 마음만 멈춘 것처럼. 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더라도, 내가 머물러 있는 이 자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겨울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건넨다. 눈이 덮인 대지 위를 걷다 보면, 그 고요 속에서 한 가지 깨닫게 된다. 사랑이 떠나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움도, 미련도, 모든 기억들이 결국 사랑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오늘도 창밖에 눈이 내린다. 차가운 창문을 열어 본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공기 속에는 한때 그의 숨결이 섞여 있을 것만 같다. 현실은 늘 조용히 나를 흔들어 깨운다. 눈은 녹는다. 언젠가 그리움도 녹아야 할 것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이니까. 하지만 마음은 그 이치를 따라가기를 망설인다. 아직은 그 겨울의 한가운데에 머물고 싶다.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도 천천히 잠식되는 걸 허락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돌아온다는 말처럼, 겨울이 끝나면 또 다른 계절이 온다. 새 봄은 사랑과 온기를 약속하고, 나는 또다시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는다. 계절이 바뀌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그리워한다. 지나간 것들을 후회하거나 붙잡으려 하는 대신, 나는 떠난 자리의 온기를 손에 담아본다.
계절의 끝에서 서성이는 발끝으로, 나는 조용히 되뇌인다.
“사랑은 남는다. 계절의 끝에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