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내게 약속하지 않았다. 매년 돌아오겠다는 보장을 받은 적도 없었다. 계절은 늘 나를 지나가듯 스쳐 갔다. 겨울의 흰 잔해 속에서 문득 고개를 드는 새싹이나, 잎보다 먼저 피어났던 분홍빛 꽃잎을 통해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아, 봄이 왔구나 하고.
아파트 단지 앞에는 오래된 벚나무가 있었다. 내가 그곳에 이사 왔을 때부터 자리를 지키던 나무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시들어 가는 듯 보였던 그 나무가 해마다 잊지 않고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는 그 나무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언젠가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 나무는 내가 몰랐던 긴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많은 계절을 견디고 있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봄의 순간뿐이었다. 그래서 매년 봄이 찾아올 때면 안도감과 서글픔이 뒤섞인 마음이 들곤 했다.
그해도 마찬가지였다. 벚꽃이 피었다.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던 꽃잎을 보며 한참을 멈춰 섰다. 누군가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겠지만, 나는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를 눈으로만 담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길 위로 내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 느꼈다. 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삶도, 계절도 내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봄은 천천히 오기로 했다. 겨울을 견딘 것처럼, 봄도 기다려야 비로소 왔다. 빠르게 피고 빠르게 졌던 꽃들처럼 나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갔다. 한때는 이 흐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 계절을 마주하는 일이 끝없는 기다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기다림은 봄이 오기 위한 전제가 아니라, 봄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해 봄은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아마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꽃이 진 자리에는 새로운 잎이 돋아났고, 바람은 다시 차가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 빈자리에 또다시 나 자신을 놓아두고 말았을 것이다. 지나간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데엔 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결국 지나갔고,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조금씩 덜어내는 법을 익혀 갔다.
봄은 반드시 나를 지나갔고, 나는 그 지나감 속에서 매년 다시 태어났었다. 그것이야말로 봄의 속성이었을 것이다. 떠날 줄 알면서도, 늘 머무는 듯이. 삶이란, 끝없이 흩어지는 꽃잎을 따라 걷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 꽃잎의 흐름 속에서 나도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