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그 설계를 다시 선택한다.
그대는 그대의 삶을 직접 설계하여 이 땅에 내려왔다.
설사 지금은 그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없다 해도,
이 생의 모든 흐름은 그대의 영혼이 택한 큰 틀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대는 이미 깊은 차원에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설계는 완성된 대본이 아니다.
그대는 그 틀 안에서 수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며,
매 순간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존재다.
이 삶을 창조한 의식으로서,
그 설계를 뛰어넘어 해석할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이제는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라.
|이 생의 시나리오는 내가 구성했다.
우리는 이 생의 무대를 직접 디자인했다.
단지 부모와 가족만이 아니라, 태어날 나라, 시대적 배경, 몸의 특성, 재정적 환경, 사회적 관습, 교육 구조, 심지어 나를 둘러싼 종교적 분위기와 정치적 기류까지. 모두가 하나의 의도된 틀이었다.
그러나 이 설정들은 삶을 제약하기 위한 족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조건 속에서 내가 어떤 의미를 새롭게 쓸 것인지, 어떤 나를 다시 선택할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 마련된 울림의 장치였다.
우리는 극복과 초월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사랑을 확장하고, 분리의 환영을 넘어서는 길을 스스로에게 제시한다.
제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내 선택을 더 빛나게 만드는 촉매다.
그 불편함과 고통을 마주할 때,
영혼은 '나는 이 조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무한성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동성애가 금지되던 환경에서 태어난 영혼이 있다.
그는 남자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른 남자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며, 그 감정을 억누르고 자책한다.
사랑하고 싶지만 그 사랑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는 벽 앞에서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기며 한없이 부서진다. 그러나 부서짐 속에서 조용한 질문이 솟는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정말 잘못된 것일까?”
그 질문은 오랜 고통의 밑바닥에서 조금씩 그의 마음을 열어,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는 여전히 두렵고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내 사랑은 죄가 아니다.’
사회와 종교는 그를 여전히 죄인으로 낙인찍지만, 그는 그 모든 벽을 넘어 사랑의 실체와 마주한다.
그 고통과 저항은 결국 ‘사랑의 본질은 성별이나 관습을 넘어선다’는 우주적 사랑의 메시지가 된다.
또 다른 영혼은 부족함을 깊이 체험한다.
이 부족함은 묻는다.
“풍요란 무엇인가? 돈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혹은 버려짐과 외로움을 반복해서 겪는 영혼이 있다.
그 외로움은 속삭인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남들과 다른 성향이나 사고방식 때문에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그 과정 통해 ‘진정한 자아를 세상에 드러낼 용기’를 배운다.
이렇듯 장애, 성별, 성적 지향, 가난,
심지어 전쟁이나 정치적 억압 같은 환경조차도 모두 하나의 ‘각성 장치’다.
그러나 이 장치는 우리를 작아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제약 안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쓸 것인가? 어떤 나로 빛날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선택의 자유를 일깨우는 통로다.
| 이 선택의 순간이 자유의지다.
영혼은 섬세하다. 정밀하다. 혼란마저도 정교하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큰 틀의 시나리오를 설계한다.
그러나 그것은 굳어 있는 운명이 아니다. 정해진 길목은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어떤 길을 택할지, 어떤 음을 울릴지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완성된다.
삶은 설계된 악보이자, 동시에 매 순간 새롭게 연주되는 음악이다.
때로는 내 성격조차, 내 말투조차, 감정이 흔들리는 패턴조차 영혼이 미리 심어둔 ‘실험’이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하며, 영혼은 매 장면을 섬세하게 구성한다. 우리가 단점이라 부르고 실패라 여기는 순간조차, 그 흐름이 아니고서는 결코 울릴 수 없는 파동을 위한 진동이다.
삶은 그 모든 파동이 부딪히고 섞이며 완성되는 한 곡의 교향곡이다.
우리는 환경의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환경의 설계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이 선택의 순간이 곧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환경을 거부하는 힘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 안에서 무엇을 의미로 만들 것인지 선택하는 힘이다.
같은 사건도 어떤 이는 상처로 남기고, 어떤 이는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환경은 진리를 숨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꺼내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의 부모가 필요했고, 지금의 자아구조가 필요했고,
지금의 고통조차 나를 깨우는 설계였다.
자유의지는 그 설계를 새롭게 읽어내고, 그 안에 숨은 빛을 찾아내는 내면의 눈이다.
| 나를 다시 선택하는 존재로서.
설계는 완전했다.
하지만 그 설계를 어떻게 살아낼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내가 깨어나기로 결심하는 순간,
설계는 단순한 배경이 되고,
나는 그 배경 위에 진짜 ‘나’라는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조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빚을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조건을 뛰어넘어 그 조건의 의미를 새롭게 쓸 수 있다.
그 한 줄의 선택,
그 한 줄의 자각,
그 한 줄의 ‘아, 이것도 내가 만든 거였구나’ 하는 순간,
그곳이 바로 설계와 자유의지가 서로를 완성시키는 지점이다.
우리는 바로 그 경험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
△
조건을 초월하는 자로서,
이 모든 환경 속에서,
나를 다시 선택하는 존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