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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엽시계 Apr 07. 2022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반말로..

시인은 그렇게 외로운 짐승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나이를 중시하는 나라다.        


길거리에서 의도치 않게 타인과 시비가 붙어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이 “너 몇 살이야?”라면서 상대의 나이를 공손(?)하게 물어보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게 된다.

          

나이가 많으면 상대에게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나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다.         


연장자를 우대해야 한다는 우리의 사고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과거에 나이 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대뜸 반말을 했지만 지금은 그랬다가는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시대가 변해 우리는 처음 본 이에게는 어린아이들이 아닌 이상 친해지기 전까지는 존댓말로 대화를 하며 상대를 존중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가 읽는 신문들의 기사는 죄다 반말일까?”      

    

신문의 기사를 쓰는 기자들 중에 적어도 절반 정도는 나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분명할 텐데 내가 읽는 신문의 기사는 죄다 나를 향해 반말을 하고 있다.          

     

어디 신문뿐일까.     

우리의 가슴을 울려 주는 각종 소설들.

나의 감성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수필들.

그 모든 작품들 역시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          

작가들이나 기자들 모두 100세를 넘긴 어르신들인가?.         

 

왜 그들은 자신의 작품과 기사를 읽어주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는 소중하고 고마운 독자들에게 반말을 일삼는 것일까?          

     

그들에게 아무한테나 반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부여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책이나 신문 속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적을 때에는 반말체로 글을 써야 하는 그들만의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기자가 TV에서 기사를 전하면서 반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으신가?

그 기자도 자신의 기사를 신문에 게재할 때는 독자에게 반말로 기사를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이 말이야 일관성이 있어야지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데?     


그런 반말식의 글들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나를 가르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어서 본 문학 작품 중 일부의 시(詩)를 제외하고는 존댓말로 써진 작품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신문이고 소설이고 수필이고 죄다 나를 향해 반말을 하는 작품들만 보았을 뿐.

어찌 보면 그동안 나는 불친절한 문학작품과 기사를 읽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과거에 받아 온 교육의 영향 때문일까?     

기성세대는 문학 작품을 읽고 자신이 느낀 감정마저 다른 사람들과 같아야 한다고 강요당하며 배워왔다.     


그 시(詩)를 읽을 때 나는 그 시인이 거친 벌판에 내던져진 한 마리의 외로운 짐승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한 마리의 외로운 짐승이라고 적어내야 정답 처리를 해주다.

그리하여 그 시인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에게 한 마리의 외로운 짐승으로 남고 말았다.

.

자신의 감정마저 정해진 답안으로 표현해야 했던 그 시대의 교육에 의한 영향으로 인해 문학 작품이나 기사를 쓸 때 나 자신도 모르게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과거 배운 대로 글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은 거의 존댓말로 썼다는 것.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대요.”

“신데렐라는 파티에 너무나 가고 싶었어요.”

“욕심쟁이 놀부는 착한 흥부를 미워했어요.”       

   

그 동화책의 작가 또는 번안한 이들은 어린이였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임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린아이인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며 친절하게 존댓말을 한 것이다.          

     



어찌 보면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존중을 해가면서 존칭을 해야 할 상대에게는 반말로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어리고 귀여워서 반말로 이야기해도 괜찮은 아이들에게는 존댓말로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한다니 말이다.          

저런 생각을 예전에도 가끔 한 적이 있었다.

왜 얼굴도 본 적 없는 나한테 작가들은 반말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 라는 어찌 보면 조금은 쓸데없는 생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도 지금 반말로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하고 있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앞으로 나도 존댓말을 사용하는 글을 적어 볼까?


어린아이였던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친절하게 존댓말로 나에게 말을 건네 준 동화책.

그런 친절함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도 동화책은 편히 읽히는 것이 아닐까?          


간결한 방식의 의미 전달인 반말식 문체의 문학 작품도 좋지만,

같이 얼굴 보며 대화하듯 존대의 언어로  수필도 읽고 싶고,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도 사투리로 쓴 소설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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