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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엽시계 Apr 17. 2022

세상과의 불완전한 이별

당신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인가요?

뉴스를 보다가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문득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저 사고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오늘 죽을 줄 알았을까?”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이 '죽음'이라는 것을 바로 자신의 한 발자국 앞에 두고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단어가 바로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고는 쉽게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이라는 시간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에 서로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에 의지하면서 그러한 두려움을 잊고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생각의 이면에 "과연 사후의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기도 한다.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써 그 모든 것이 끝난다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 실체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한 번 죽어본다면 알 수 있겠지.     




'죽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두려운 것은 생명으로서 나의 삶이 다해 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중하게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기에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 또한 그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린 시절 어린이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인도 사람들은 죽을 때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자신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보다 안락한 다른 세계로 자신의 영혼이 인도된다는 아주 강렬한 종교적인 믿음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과연 나 자신은 죽음이라는 시간의 문 앞에 그들처럼 초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이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소중한 사람을 가졌고 그들에게 내가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완전한 이별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먼 훗날...

아니 요즘처럼 불안한 세상에서는 바로 몇 시간 후 아니면 내일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생의 마지막이라는 순간이 왔을 때 조금이라도 작은 후회만을 가지고 세상과의 이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세상과의 완전한 이별이 아닌 다른 이들 가슴속에 내가 기억되는 조금은 불완전한 이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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