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aeyimpact Jan 28. 2023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된다는 것

오디세우스를 겉핥기식으로 읽었다. 제대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만, 그때가 온다고 해도 아마 제대로 읽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3000년 전 쓰인 책이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글로 쓰다 보니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있고, 그 당시의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계를 이름 앞에 붙여서 언뜻 이해가 쉽게 되지 않기도 한다. (예로, '오디세우스'라고 쓰지 않고, 라에르테스의 아들로 이타카 섬을 다스리는 오디세우스라고 표현하는 것) 나오는 지명과 이름이 낯선 것도 한 몫한다. 


유럽에서는 중고등학교 때 오디세우스를 읽는다고 하니, 나이 30대 중후반에 읽는 나와 얼마나 격차가 클까 싶다. 오늘 독서 모임에서 각자 24편은 8명이 나눠서 자신이 맡은 파트를 설명하는데, 내 옆에 계신 선생님이 사람의 이름과 명칭을 다 외우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어려운 이름을 다 외우고, 디테일한 묘사까지도 기억하고 공유한다는 것에 얼마나 치열하게 책을 읽으셨는가 느껴졌다. 그에 반해 나는 러프하게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건과 문장만 밑줄치고 내 생각을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독서모임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다른 양식과 방식으로 책을 읽고 공유하면서 내가 모르는 영역과 보지 못하는 부분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오디세이아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전쟁에 나가고 귀향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모험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오디세우스'를 통해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스토리를 어떻게 쓸 것인지 질문을 받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편안하게 안주하는 삶, 불멸의 삶에 대한 달콤한 유혹을 느꼈고 갈등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불사가 아닌 필사를 선택했고, 편안한 삶이 아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자기의 자리롤 돌아가려고 갖은 고생을 해서 간다. 이 지점이 이야기화 되지 않은 사람과 이야기화 된 사람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아르놀트 뵈클린


나라는 인간은 이야기로 남지 않고 바람결에 삶이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면서도, 오디세우스만큼의 용기가 없음을 안다. 결국은 환경이다. 오디세우스와 같이 문제 속에 나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오디세우스 곁에 지혜로운 이들을 찾아 내 곁에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목표한 '이야기'가 되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자신감과 교만'이 한 끗 차이라는 것이다. '겸손함과 비굴함'도 한 끗차이고. 오디세우스는 일반 사람에 비해 대단히 지혜롭고 뛰어난 사람이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우를 범해 고통 속에 빠진다. 


그 잘못은 퀴클로페스의 눈을 찌르고 배를 타고 떠날 때 '그렇게 몰골이 사납게 눈이 먼 까닭을 묻거들랑, 도성을 함락시키는 저 오디세우스, 라에르테스의 아들로 이타카 섬에 살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장님이 되었노라고 하란 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오디세우스 동지들이 오디세우스의 흥분한 마음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듣지 않았다. 퀴클롭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이야기해 증오를 받는 자, 오디세우스로 고행길을 걷게 된다. 


자신에 대한 Proud를 갖는 것은 좋은 측면으로는 자신감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어두운 면은 '교만함'을 갖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측면을 취하고 어두운 면을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 객관화'를 통한 '겸손'만이 답인데 이는 지독히 매일 자신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매일, 매 순간 지독히 노력하지 않으면 뛰어난 오디세우스가 실수한 그 잘못을 나는 자주 빈번히 실수할 수 있을 테니. 


작가의 이전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잖아, 연진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