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쩌면 곧 지워질 수도 있는,
집에 도착했는데 이상한 무력감이 나를 감싼다.
사무실에서 있을 때부터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이 땡겨 퇴근하고 집에 가면 라면을 야무지게 먹어야겠다고 신나게 생각을 했었지만 집에 들어오니 배는 고픈데 입맛이 사라졌다.
이유가 뭘까. 집에 도착하니 아픈 누나와 항상 생활고에 시달리는 형, 그 에너지를 내가 온전히 감당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주방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출입구에서 약 10미터도 안 돼보이는 일자형 거실 겸 부엌의 좁디좁은 싱크대에는 두 개의 냄비가 설거지도 되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다.
이미 11시 막차로 집에 들어와 몸에 남아있는 에너지도 없으나, 눈치 없이 허기진 배는 먹을 걸 집어넣으라고 소리친다.
다행인지 모를 이러한 상황에서의 입맛없음은 눈치없는 허기를 이길 정도의 무력감을 가져온다.
일단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밥 먹기 전에 씻어야겠다 생각하고 냄비를 쓰지 않아도 되는 메뉴로 바꾸기로 타협해본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급하게 바뀐 메뉴는 계란 후라이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다 때려박아 완성시킬 양푼 비빔밥이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금 상쾌해진 기분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온다.
몸이 상쾌해진 탓일까. 갑자기 계란후라이 할 때의 기름 냄새가 맡기 싫어진다. 변덕인지 지랄인지 모를 내가 싫어지는 상황이다.
기름냄새가 맡기 싫은건지 후라이 하나만 해도 온 방에 기름냄새가 퍼지는 좁디 좁은, 그리고 환기마저 잘 되지 않는 이 현실이 싫은건지 약간 헷갈리는 타이밍이다.
그리고 한 가지 뒤늦게 깨달은 건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도, 가끔 일을 다 끝내도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별생각없이 사무실에서 밍기적대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이유를 이제는 대충 알 것 같다.
화려한 역삼 테헤란로의 강남 한 복판 빌딩 속에 자유롭게 온종일을 보내고 난 뒤,
집에 돌아오면 시궁창과도 같은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다.
역삼역 3번 출구로 올라오면 걸어서 1분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혼자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110만원대의 사무실이 있고, 물론 내가 돈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능력이라 믿으며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허울뿐이었다.
그 화려해 보이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려 SNS도 잘 하지 않는데,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걸 보니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방어태세를 취했다고 생각했지만, 한 순간에 예상치도 못한 것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예전 프리랜서 생활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한 단계 성장시켜보겠다는 명목하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말이고 평일이고 온종일 사무실에 짱박혀 있는 이유를 스스로 인지하게 된 순간이다. 지금 이 집, 그리고 나를 둘러싼 에너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거였구나.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데, 이게 일상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더 시려온다.
더 늦기 전에 나는 이사 겸 사무실 공간을 구할 것이다. 독립을 하겠지만 그런다고 이 감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지는 미지수다. 새로운 내 사무실을 구하려는 것은 사업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말 못할 무엇으로부터의 나름의 해방책이기도 한 거였다.
내 인생은 잘되고 있는 듯한데, 계속하여 나아가고 있고 잘 풀리는 듯한데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삶조차 깜깜하고 막막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배부른 투정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계란후라이 없이 냉장고 속 김치와 몇 가지 반찬으로 허기를 메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