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영 Feb 04. 2016

나와 그 사이의 벽

교환학생 일기#6 2016.01.26

오늘의 이야기는 여느 때와는 달리, 조금 우울한 이야기다. 


2016년 1월 26일, 입에 거미줄 칠 기세.

시내를 구경하다가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려서 밥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니고, 덴마크의 이상한 음식문화가 내 입맛에 맞지 않아서도 아니다. '입에 거미줄 치겠다'는 표현은 입으로 들어가는 게 없을 때 쓰는 말이지만 나의 경우는 반대이다. 입에서 나오는 게 없어서 거미줄이 칠 것 같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Introduction Week이 시작되었다. 

Introduction Week의 시작은 무료 유심칩 제공. 좋은 시작이다.

Introduction week는 유심칩과 각종 안내 서류들이 들어있는 파일을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외국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속으로 

"영어실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음식을 주문하거나 길을 물을 정도는 할 수 있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면 나의 시야도 넓어질 테고,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의 못난 영어실력도 어느 정도 늘겠지. 그들의 문화는 어떠할 것이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개방적인 사고방식에 기죽지 말아야지. 그냥 부딪혀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어로 감정을 공유하고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언어의 장벽은 쉽게 허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와 외국인 친구들 사이의 벽은 내가 얕본 만큼 얇지 않았다. 물론 인사를 하는 정도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름을 이야기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이야기하고, 전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첫 번째,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속한 버디 그룹은 매우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슬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말레이시아, 핀란드 등 모두 합쳐 11명인데 대부분이 국적이 다르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영어가 아닌 그들의 고유한 언어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영어를 잘했다. 웃는 얼굴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에  둘러앉았는데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간간이 들리는 '아는 단어'가 있을 뿐. 모두가 웃는 농담에 나 혼자 웃을 수 없었고, 간혹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친절한 친구의 질문에도 'sorry,  pardon?'을 연발해야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곧 슬펐다. 내색할 수 없었지만 나의 근거 없던 자신감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듣기가 약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못 알아들을 줄이야. 

그리고 조용히 친한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얘들아, 지금부터 닥치고 영어 공부해."



쉬는 시간,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앞에 나와서 하는 발표도 다 알아듣기 어렵다. 나의 못난 영어실력 ㅠ



두 번째, 그들과 무엇에 대해 말해야 할지 몰랐다.  

수능시험장에서 영어 듣기 평가를 하듯,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친구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나에게 미국에서 온 여학생이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인들은 우리와 나이를 다르게 세는 거야?"


오, 재미있는 대화 주제다. 이 기회를 살리고 싶었다.

 "동양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1살이야.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한 명의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이를 세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말 되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고 100일이 될 때 이를 기념하는 파티를 열어."

라고 말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로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버벅거리긴 했지만 의미는 대충 전달한 것 같았다. 다들 굉장히 흥미로워하고 말이 된다고 맞장구쳐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이 친구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구나,  재미있어하는구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 친구가 자신의 나라에 대해 한창 이야기할 때, 다른 친구들은 자기가 알던 핀란드의 속설이나 핀란드의 여행하기 좋은 도시들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를 이어갔다. 핀란드에 대해서라곤 자일리톨껌 밖에 모르는 내가 그들의 대화에 쉽게 녹아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쉽게 그들과 대화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유럽에 대한 교양과 상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생각난 것이라고는 '삼성, 강남스타일, 뚜렷한 사계절' 정도였다. 삼성은 괜히 물어보지도 않은 자랑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강남스타일은 너무 진부했다. 사계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외국인 친구들의 표정이 그다지 흥미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착한 이 친구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 한국인을 위해 웃으면서 반응해준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열풍이나 전통문화에 대해 설명하면 이 친구들이 조금 더 흥미로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록 그 순간에 이런 것들이 생각났다고 해도 나의 어휘 실력은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처음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미국 친구가 어떻게 그런 재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나 또한 그들에게 궁금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사소한 관심들은 좋은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인 셈이다. 나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을 뿐이고. 



세 번째, 결정적으로 그들은 나에게 말을 자주 걸어주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과장된 리액션을 바탕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갔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대화를 이어갔다. 이건 나에게 '대화'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차라리 아무 욕심이 없었더라면 이런 당혹스러움도 없었겠지만 '뭐라도 배우고 오자,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서 오자'라는 욕심에 끊임없이 대화를 끼려고 시도했다. 나에게 질문을 던져줄 친구가 없는지 눈치를 보기도 한다. 

이건 정말 "끝장나게" 피곤한 일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마디도 못하던 서툰 예능인들의 비참한 심정을 나도 느끼고 말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함께 교환학생을 온 한국 친구들이 한 방에 모였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모두가 그 날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경험한 비참한 심경을 모두 함께 공유했다.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그룹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본인이었다고 말하면서,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한 자신들의 '외로운 감정'을 친구들과 나눴다. 


감정이 공유된다. 

내가 경험한 것을 저 친구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대화는 상당히 즐겁다. 

그러다 누군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저 한 구석에 외국인이 함께 있었다면 우리가 관심이나 줬을까?

당시에는 조금 서운했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고, 같은 유럽 사람으로서, 같은 서양사람으로서, 심지어 영어를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말도 잘  못 하고 말을 걸어줘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동양인 친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게 확실히 편안한 일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오히려 지금은 간간이 나에게 먼저 말을 붙여주던 그 친구들의 배려가 눈물 나게 고마울 정도다. 


마시멜로우 챌린지.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바디랭귀지를 통해 나름 아이디어도 내고 조언도 할 수 있었다. 




새롭고 넓은 세상을 동경해온 나는 도대체 무얼 믿고 영어공부를 등한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씩 영어공부라도 해야 하나? 혼란스럽다.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영어공부 말고도 배워가고 경험할 게 얼마나 많은데. 


걱정이 많은 밤, 다행히도(?) 나만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그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도, 힘든 와중에 방 정리를 했을 때도 안 나던 코피가 난다. 심적으로 매우 피곤한 하루여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같은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과 나름대로 대화를 했다는 것.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지친 표정으로 기숙사에 돌아온 나를 환하게 반겨주는 그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이름도 헷갈리는 그 친구들과 한바탕 떠들고 왔다. 물론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웃는 타이밍에 같이 웃어주느라 안면 근육 마비가 올 것 같아도 그들과 이야기한 30분 덕분에 바닥을 쳤던 자신감을 조금 되찾았다. 


교환학생 너, 생각보다 만만하진 않구나?


그래도 이 정도로 기죽을 내가 아니지. 오늘 안되면 내일 덤비자. 그래도 안되면  그 다음날. 

외로운 감정,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나는 매일 더 나아지리라.



교환학생의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유럽의 스타일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