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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영 Feb 07. 2016

언어의 장벽에 작은 구멍내기

교환학생 일기#7 2016.01.30

2016년 1월 29일, 물리학으로 통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외국인 친구들과 마음대로 의사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고 있었다. 이대로가다간 한 학기가 다 끝날 때까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외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오늘은 버디(Buddy) 그룹이 원래의 그룹에서 Study Buddy 그룹으로 바뀌는 날이다. 다시말해 같은 학과 친구들끼리 모이는 날이다. 물론 나는 우리 Buddy 그룹의 친구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만 왠지 처음 만나는 친구들 앞에서는 조금 더 당당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9일 오전 9시,  다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서 늦잠을 자는지 스터디 버디를 포함해서 오직 두명 만 제시간에 와서 나를 반겼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울상이었던 라스는 나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헤이! 웰컴!'을 외치기도 했다. 20~30분이 흐르고, 친구들이 모두 왔다. 환경공학 그룹은 20명도 넘는데 물리 그룹은 오직 6명이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순수학문은 역시나 인기가 없다. 특히 물리는.


어찌되었건 물리학과를 다니는 그 친구들은 정말 유쾌했다. 물리 그룹의 버디인 프레드는 쉴새 없이 말을 했는데 너무 빨라서 반도 알아듣지 못했고, 사자머리를 한 필은 미국에서 왔음에도 과묵하게 있으면서 허허 웃기만 했다. 홍콩에서 왔다는 KJ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해서 오히려 알아듣기가 편했다. 다들 개성이 넘치지만 물리를 공부한다는 묘한 동질감이 우리를 이어줬다. 


Fysikvej. '물리길'이라는 뜻이다... 작명센스가 참...


이 친구들과 전공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세부 관심 분야에 대해서도 이야기도 나눴다. 그러던 중, 나와 홍콩친구 KJ 가 물리과목들이 아닌 다른 학과 과목들을 많이 들어보고 싶어한다는 걸 안 프레드는 이렇게 물었다.


너희 물리학자 될거 아니야?


나는 단지 우리나라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하고 다양한 분야의 수업들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교환학생 까지 와서 공식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기는 싫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프레드의 눈에는 조금 신기해보였나 보다. 물리과목을 추천해 달라는 나의 질문에 프레드는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들이 물리를 공부하는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었다. 돈 못벌고 가난해도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물리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대학교에 들어와서 전공을 물리로 정할 때만 해도 나 역시 그런 자부심을 가득안고 있었다. 선배들이 아무리 뜯어 말려도 다른건 생각해본적이 없다며 아무 망설임 없이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공공부를 하면 할 수록 물리를 해야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름 좋다고 생각했던 내 머리가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솔직히, 그럴 때 마다 나는 앞으로도 이 길을 계속 헤쳐나갈 수 있을지 수 없이 고민했다. 

이 고민은 현재도 진행중이고,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들 말하고, 나도 이제는 나의 전공 분야를 확실히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난 더 고민하겠다는 내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아직까지 그렇게 나쁜 선택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프레드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물어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 심각하게 물어본 질문은 아니었는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그의 질문과 얽히는 바람에 쓸데없이 머리가 복잡해졌다. 





I'm wonder boy!


묵직한 진로고민은 내려놓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러 갔다. 한국의 술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그들이 곧이어 재미있는 게임을 하나 알려주었다. 게임의 이름은 Beerpong. 테이블 양쪽에 컵을 볼링핀처럼 놓고 그 안에 맥주를 따른다. 그 다음 양쪽에서 서로의 맥주컵에 탁구공을 던져서 들어가면 상대팀이 그 맥주를 마셔야 한다. 한 번 보면 룰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직관적인 게임이다. 미국에서는 많이 한다는데, 이 게임을 본 것도 처음이고 꽤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팀을 나눠서 게임을 시작했다. 


BeerPong!


게임이 시작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팀에서 마지막 차례였던 나는 차례차례 공을 맥주컵에 집어 넣는데 성공했다. 한 번, 두 번... 모두가 실패하는데 나만 계속 성공했다. 우리 팀은 (참 별거 아닌데도)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가득 테이블을 에워쌌고 내가 성공할 공을 넣는데 성공할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결국 5명이었던 우리 팀에서 10개 중 6개를 내가 성공시켰다. 

마지막 공을 성공시킬 때 사람들은 이미 나를 원더보이(Wonder Boy)라고 불르고 있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던지는 사람은 처음본다면서 나를 추켜세웠고 심지어 나에게 맥주를 건내며 자기 팀으로 스카웃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환호성은 받아본 적이 없다.


얼떨떨하다. 정말 별거 아닌데 너무 기뻤다. 말을 못해서 소심이가 되었던 어제와는 달리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한 마디씩 건넨다. 원더보이라고. 스카웃당하며 받은 맥주를 마셔서인지 칭찬에 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어순이 틀려도 아무렇게나 말해도 그들은 알아들었고, 나 또한 그들의 말에 더 크게 반응해주었다. 덕분에 많은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비어퐁, 나에게 있어서는 자신감을 되찾아준 참 고마운 게임이다. 



비어퐁에서 활약한 기세를 몰아 학교 지하에 있는 학생 Bar(S Huset)까지 가게 되었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피곤하다며 기숙사로 돌아갔을 지 모른다. 적당히 기분좋은 상태로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우리나라의 술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
신나게 웃고 떠드는 외국인들을 보면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샘솓는다




생각보다 길었던 인트로덕션 위크가 끝이났다. 

4일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간단한 덴마크어도 배웠고, 초등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배워보지 않았던 춤(살사댄스)을 배웠다. 학생들에게 부엌과 창작 공간 등 많은 것들을 제공하는 Skylab도 방문하고 버디 친구들과 과학관에 가서 놀기도 했다. 


하나하나 기록하자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다 적지는 못하겠다. 이미 몇 개의 행사들은 잘 생각나지도 않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만족스러운 일주일이었다. 물론 첫날엔 조금 심하게 멘붕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의 학교 생활 적응이 더 늦어졌을테니까 매를 먼저 맞은 것이라 생각한다. 




인트로덕션 위크가 모두 끝이 났고 곧 개강이다. 즉, 낯선 외국인 친구를 만나도 인사를 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사했던 버디 친구들, 스터디 버디 친구들, 기숙사 친구들과 모두 잘 지내고 싶다. 

이 넓은 캠퍼스에서 얼마나 자주 마주치게 되려나. 

이 친구들과의 인연은 길게, 깊게 이어질 수 있을까. 






하필 올해 꼭 지키고 싶은 가치가 '꾸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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