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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영 Feb 29. 2016

'남을 위한' 밥상과 '나를 위한' 밥상.

교환학생 일기 #13 - 음식으로 전하고 받는 마음

밥 하는 게 왜 이리 귀찮던지.


나는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다. 웬만한 사람보다 늦게까지 깨어있어서 자는 시간만 놓고 본다면 보통 사람들과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충분하게 잠을 잔 날에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정말 힘들다. 아무 일정이 없으면 12시를 넘겨서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에야 부엌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다른 컨테이너 친구가 아침인사를 하는 동시에 지금 일어난 거냐고 묻는다.


그럼, 오늘 일요일인데 뭐 어때.


친구가 맛있는 브런치 먹으라며 어깨를 툭툭 치고 갔고,  그때부터 나는 오늘 밥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니 거창한 요리를 해 먹기에는 재료들이 마땅치 않다. 더군다나 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나마 남아있는 식재료들도 신선하지가 않다. 몇 시간만 버티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기에 지난번 사온 스낵 스파게티(컵라면)를 뜯어 뜨거운 물을 부었고, 나는 하루에 두 번씩 요리를 해 먹을 만큼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요리는 생각보다 귀찮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이다. 거의 모든 음식들에 다진 마늘이 들어가는데, 매번 마늘을 까고 다지는 일을 해야 한다. 양파도, 감자도 마찬가지고. 재료가 없으면 그 전에 장을 봐서  사 와야 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다 먹고 난 뒤 설거지까지!

 요리를 해보기 전까지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과정들이 필요한지 몰랐는데, 이곳에서 요리를 하다 보니 가끔 엄마가 왜 밥하기를  귀찮아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엄마가 나에게 해주는 반찬들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요리라는게 정말 재미있으면서도...귀찮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런 귀찮은 과정을 자발적으로 하게 만든 계기가 있다.




태어나서 처음 차려본 '남을 위한 밥상'


인트로덕션 위크가 끝나고 버디 그룹과 조금 소원해진 이후 컨테이너 친구들이 정말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다른 컨테이너의 분위기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컨테이너는 정말 화목하다. 친구 몰래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해서 서로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특히 남자들은 밖에 놀러 갈 갈 때 나를 빼놓지 않고 챙겨준다.  그중에서도 정말 마음에 드는 우리 컨테이너만의 문화는 주 1회 돌아가면서 요리를 하는 것이다.


이곳에 온지 며칠 안되어서 친구들과 서먹했을 때, 나는 친구들과 멕시코 친구의 타코와 인도 친구의 닭 요리를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내가 비록 이 친구들이 하는 농담을 그때그때 재치 있게 받아치지는 못했지만, 다 같이 식탁에 앉는 것만으로 함께 웃는 순간들을 쌓아 갈 수 있었다.

요리를 하는 순번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발적으로 하고 싶으면 요리를 하는 것이었는데, 다음에 누가 요리를 해줄 거냐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혼자 9인분의 상을 준비해야 하는 귀찮음을 눌러버린 그 마음은 일종의 '고마움'이었다. 내가 먹을 밥도 잘 안 해 먹는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성공해서 친구들이 나에게 차려준 따듯한 밥상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나 보다.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불고기'와 '떡볶이'를 하기로 했다. 조합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한국의 매운 음식 떡볶이와 외국인들이 대체적으로 좋아한다는 불고기 모두 해주고 싶었다.


드디어 요리를 하는 당일 아침이 되었다. 요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여서 봤던 레시피를 보고 또 보고, 다른 레시피도 찾아보고, 어떤 레시피가 가장 좋을지 고민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이미지 트레이닝도 끝없이 반복하고 모든 일의 순서를 메모장에 옮겨 적는다. 장을 보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불고기감으로 쓸만한 고기가 없다. 번역기를 돌려서 등심 부위를 알아낸 뒤 얇게 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9인분 어치의 고기를 썰으려면... 3시간 전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저녁 식사 3시간 전, 냉동실에 얼려둔 고기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차가운 고깃덩이의 촉감이 손의 감각을 점점 무디게 했다. 고기 한 덩이 썰고 나면 고기를 잡고 있던 왼손이 너무 시려서 따듯한 물에 녹여야 했다. 고기가 너무 얼어있으면 잘 썰리지 않고, 너무 녹아있으면 얇게 썰기가 어려워서 냉동실에 넣었다 꺼냈다를 반복하며 40여 분간 고기와 사투를 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대충 해도 되었을 텐데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맛있고 부드러운 불고기를 만들기 위해 그 고생을 했다.


떡과 불고기 양념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지만, 9인분을 혼자 준비하는 건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망했을 때 책임을 분담할 사람)인 한국인 친구를 부를까도 생각했는데, 괜히 이번엔 온전하게 '혼자' 도전해보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나 혼자도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저녁식사 30분 전,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와줄 것 없냐며 도움을 자청하는 친구들에게 양파 썰기, 테이블 세팅, 계란 삶기 등 잡다한 일들을 부탁했고, 약속했던 시간을 15분 정도 넘긴 시점에 모든 음식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플레이팅까지 할 정신이 없어서 그냥 먹었지만 맛은 정말 좋았다.

드디어 완성! 맛은 만족스러웠고 친구들이 입을 모아 정말 맛있다고 칭찬해주었다.

사실 한 번 해보고 나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라는 생각에 더 어렵게 느껴졌나 보다. 정말 맛있게 먹는 친구들을 보면서 불고기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맛있게 먹었는지 유례없던 식후 공연이 이어졌고 레베카의 제안으로 단체사진도 찍었다. 40분 동안 고기를 써느라 칼질만 했던 그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맛있게 밥을 먹은 뒤 잠깐 이어진 공연시간.


 친구들과 처음으로 사진을 같이 찍은 이 날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친구들과 밥상을 공유한 건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있었다.


두 명의 일본 친구들과 함께.


같은 동양인으로서 많은 공감대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일본, 홍콩 친구들과의 만남도 굉장히 좋았다. 일본 친구들과의 저녁식사에서는 오야꼬동이라는 일본 음식을 먹어볼 수 있었고, 홍콩 친구들과의 저녁식사에서는 정말 빠르게 친해져서 홍콩+한국인 단톡 방까지 만들어졌다.

비록 처음 보는 사이일지라도 밥을 함께 먹는 시간만큼은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고 상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게다가,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준 경우라면 그 음식을 준비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과 쏟은 정성을 가늠해보면서 그 친구에게 마음을 열게 되기도 한다. 내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꽤나 손이 많이 가고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이고 빠르게 상대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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