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3 프랑스 남부 여행 - 니스
프랑스 남부로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세계 3대 카니발'이라 불리는 니스 카니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건만, 우리는 여행 3일째만에 비로소 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일 차 밤에 도착했고, 도착한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에즈 빌리지에서 기분 좋게 여행을 마치고 니스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는데 버스가 제 시간에 오지 않아서 1시간 가까이를 기다렸고, 심지어 만원 버스여서 니스로 돌아가는 길 3시간 동안 통로에 쭈그려 앉아 가야 했다. 원래 두 시간이면 가는 거리였지만 길이 너무 막혀 3시간이 넘게 걸렸고,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 호스트는 가버린 상태였으며, 우리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어서 아무런 연락도(심지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심각한 교통체증과 배고픔, 그리고 호스트가 없는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멘붕에 빠진 우리는 정신을 놓아버린 나머지 숙소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거기에 호스트가 보내준 지도의 표시가 헷갈려 엉뚱한 곳을 한참 동안 헤맸다. 이왕 늦은 거 정신 차리고 밥이나 먹자는 마음으로 근처에 있는 피자집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와이파이 쓸 수 있냐고 물어보는 우리를 보며 주인장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이 꼬이기 시작하니 아무것도 아닌 일도 우리에겐 고난과 시련이 된다.
따듯한 음식점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녹이고 와이파이를 연결하려는데 종업원이 적어준 글씨를 도통 알아보기가 힘들다. Ja33cofe? ls08? 딱 두 번 틀렸는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아, 이게 무슨 X고생이야...
그 순간 정말 별일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내는 내가 약간 낯설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해보니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Jazzcafe!
음식을 먹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조급하고 예민하게 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처음 보는 멋들어진 글씨체를 답답하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바꾼 건 나 자신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조용히 저 종이를 기념품으로 챙겼다. 앞으로의 여행이 얼마나 여유롭고 풍요로워질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기념품이다.
그리고 다음날, 본격적으로 니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인형이 시선을 빼앗았다. 카니발 내내 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골목을 누비며 꽃집, 광장, 벼룩시장 등을 구경했다.
도시를 가볍게 둘러본 뒤 바로 해변으로 향했다. 지평선과 물결이 없다면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듯한 바다의 색감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태어난 이후로 바다를 그렇게 많이 보며 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색깔의 바다는 처음이었다. 해변가 뒤로 보이는 노란색 건물에 빨간 지붕들까지, 너무나 조화롭다.
파도소리를 상상하라고 하면 모래사장에 파도가 밀려오면서 나는 소리인 '솨아'를 떠올렸다. 니스의 해변은 자갈해변이어서 '솨아-' 하는 고운 모래 소리 대신에 자갈 굴러가는 '자르르르르' 하는 재미있는 소리가 난다. 파도가 들어올 때 보다 나갈 때 더 뒤를 기울이게 된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참 좋은 소리다.
니스의 아름다운 해변을 실컷 구경하고 난 뒤에야 구시가지를 둘러보기 위해 이동했다. 구시가지 쪽으로 들어가는 큰 문을 지나자마자 시장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몇몇 과일과 치즈 종류 등 조금 독특한 것들을 판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것질거리도 종종 있었는데 팬케익 같은 걸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길래 이곳의 명물인가 싶어서 먹어보았다. 따듯해서 좋긴 했지만 맛은 우리나라의 빈대떡이나 부침개에 비할바가 못된다. 이 사람들은 입이 참 검소하구나.
2월 21일, 드디어 카니발을 보러 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니발의 아침이 밝았다. 태어나 처음 구경하는 카니발인데 행여나 작은 키 때문에 멋진 장면들을 놓칠세라 자리를 예약했다. 시작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들어가려고 하는데 붐비는 사람들로 도로는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그곳엔 그 어떤 줄이나 질서도 없었다. 과자를 떨어트린 곳에 개미들이 모이는 것처럼 조그마한 게이트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뿐이었다.
이 무질서한 곳에서 넋 놓고 있다간 한 시간이 지나도 못 들어갈 것 같았기에 나와 일행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앞으로 따라붙었고 비교적 빠른 순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입장하는 곳에서는 소지품 검사를 꽤나 철저하게 한다. 카메라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진행요원들에게 일일이 확인시킨 뒤에야 그 정신없는 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자리를 찾아 앉은 뒤, 뜨거운 태양빛을 목 뒤로 맞으며 퍼레이드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삼각대까지 가져와서 축제의 현장감을 담을 만만의 준비를 했다. 꽃의 축제라 불리는 이 카니발에서는 미녀들이 꽃을 던져준다고 하는데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잠시 후, 카니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이파이 보이, 걸(?)들의 경쾌한 율동과 묘기를 시작으로 하여 곧이어 꽃마차가 우리 앞을 하나 둘 씩 지나갔다. 꽃을 던져주는 꽃의 여신(?)들은 대체로 미인들이었다. 카니발이 열리기 전에는 꽃마차에 오를 사람을 뽑는 미인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각양 각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춤을 춘다. 특히 브라질의 삼바가 정말 흥겨웠다.
이번 카니발의 주제는 '미디어의 왕'이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표현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노란색의 꽃을 굉장히 많이 던져주기 때문에 앞쪽에 앉으면 쉽게 꽃을 받을 수 있다. 좌석에는 주로 어르신들이 많은데 할머니들께서 어찌나 열심히 잡으려고 하시는지.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서 꽃을 쟁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며 저분들은 아직도 소녀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꽃을 하나도 못 받은 내 뒤의 할머니께 꽃을 드리니 환하게 웃으시며 '메시'라고 인사해주신다. 노란색의 꽃보다 그 할머니의 웃음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퍼레이드가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사람들이 절반 정도 빠져나간다. 그 덕분에 떨어져서 퍼레이드를 구경했던 나와 영일이, 성철이 형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은 이미 많이 찍었겠다, 이제는 내려가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좌석에 앉으면 쉽고 편하게 퍼레이드를 구경할 수는 있지만 확실히 바로 앞에서 서서 보는 것처럼 흥이 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니스 카니발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점잖은 축제이기도 했다. (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춘다거나... 난리를 친다거나... 그런 건 없다.)
낮의 카니발을 보았으니, 이번엔 밤의 카니발을 즐겨볼 차례. 이번에도 역시 자리를 잡아 놨기 때문에 가려서 안보일 일은 없다. 이번에도 와이파이 보이, 걸 들이 신나게 군무를 추며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낮의 카니발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음향 시스템도 웅장하다. 낮의 카니발은 퍼레이드 관람의 느낌이 강했지만 밤의 카니발은 그나마 조금 축제 분위기가 더 났다.
사용되는 퍼레이드 마차의 스케일도 다르다. 워낙 커서 맨 앞에서 보면 전체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맨 앞줄에서 퍼레이드 참가자들과 함께 춤을 추면서 노는 게 재일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좌석 맨 앞줄에 앉아서 퍼레이드 조형물들의 의미를 해석해보며 관람하는 것도 나름 좋았다.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얼굴이 돌아가면서 본색이 드러난다. 미디어와 관련된 풍자성 짙은 조형물들이 많다.
중간에 태극기가 휘날려서 깜짝 놀랐다. 청춘 문화놀이단이라는 곳에서 온 한국인들이 퍼레이드 느지막이 등장했다. 굉장히 반가웠는데 부채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예쁜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부채춤까지 세계에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우리나라도 세계인의 축제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했다.
축제가 마무리되고 우리는 숙소에 돌아왔다.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자면, 세계 3대라 해서 기대를 많이 한 것에 비해 조금은 평범했던 것 같다. 멋지고 화려한 볼거리와 충분한 음악이 있었지만 축제라기보다는 하나의 공연을 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충분히 색다른 경험이었고, 세계 3대 축제라고 해서 엄청나게 대단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만약 내가 자리에 앉아있지 말고, 쿨하게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앞줄에 서서 신나게 뛰어놀았다면 조금 더 축제의 분위기에 빠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 기회로 나는 조금 더 '놀 때 잘 노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축제가 끝나고 난 뒤, 직후에는 거리에 쓰레기가 가득했지만 다음날이 되자마자 매우 빠른 속도로 쓰레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이 나오는 기계를 하나씩 짊어진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청소부들과 구역을 나눠 바쁘게 움직이는 청소차들. 니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축제 후 현장을 치우는 청소계의 프로들이 사는 도시랄까.
니스 카니발 기간에 열리는 카니발 세 개를 모두 보려고 했던 우리는 두 개의 카니발을 내리 보고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예약한 표는 환불이 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표를 팔기로 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두 번 말을 붙이기 시작하니까 그 뒤로는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다. 프랑스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좌석에 앉으려는 사람을 찾는 것도, 세 명이 같이 온 사람을 찾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어서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마침 홍콩에서 온 관광객 여학생들 세명을 만나게 되어 저렴한 가격에 표를 팔 수 있었다. 그들이 입장하는 것까지 보고 서로 고맙다며 인사를 했는데, 그 순간이 너무 재밌었다.
와, 내가 외국에 나와서 표도 팔아보는구나.
별 짓 다하고 다녀보는구나.
이 여행은 참 기억에 남겠구나.
그 뒤 남는 일정에는 샤갈 미술관, 마티스 미술관을 방문했다. 샤갈 미술관의 그림들은 화풍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주제들이 대부분 성경의 내용이어서 성경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영일이의 도움을 받으며 그림들을 감상했다.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각각의 색이 주는 느낌을 이용해서 표현하고자 한 바를 너무나 적절하게 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인상 깊었던 사진들만 사진으로 남겼는데, 사실 지금 와서 사진만 보니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일주일간의 여행 일정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날엔 공항을 가기 전까지 니스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오고 가며 질리도록 만났던 바닷가와 해변인데 헤어지려니 뭔가 아쉬워 자꾸 셔터를 누르게 된다. 누군가 꺼낸 가자는 말에도 괜히 바다에 돌이라도 한 번 더 던져본다. 다시 이런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더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그런 바다였다.
스크롤의 압박이 걱정될 정도로 사진이 많아져버렸다...
많이 추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니스는 찍으면 그냥 작품이 나오는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