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범죄 유죄판결에 흐름 대한 단상
*아래 내용은 글쓴이의 짧은 식견일 뿐이니 혹시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맞습니다.
1. 성폭력 범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처벌조항이 형법,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약칭 성폭법),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관한법률(약칭 아청법) 등 여러 법에 분산되어 있고 그에 따른 처벌도 다르다. 또한 최근 'N번방 사건' 등을 통하여 디지털 성범죄의 중대성이 많이 알려지면서 관련 법들도 계속하여 개정되고 있다.
나도 처음 형법을 공부할 때만 해도 성범죄가 여러 특별법에 분산되어 있어서 공부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정작 실무에 나와보니 복잡한 법리보다도 피해자 및 피의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것이 거의 대부분 문제되는 부분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2. 내가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2018년 즈음부터 성범죄 유무죄 판단기준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에는 내가 변호사로서 직접 사건을 수행한 것이 아니고 판례로만 공부했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경력이 많은 선배님들은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판례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며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성인지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3. 판례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양성평등기본법을 원용하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등을 고려하여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신빙성)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판례의 경향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말라"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이 달라지더라도 주요한 내용에만 진술 번복이 없다면 그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주고, 성범죄 피해자가 일반적인 피해자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더라도 그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주로 성범죄 가해자를 변호하였지만, 드물게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하여 고소를 진행한 적도 있다. 그때 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그 사람들이 성범죄로 고통받고 있는지 잘 느껴지고 상대방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던 적도 많다. 그런데 나는 이런 경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다. 왤까?
4. 만약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검사가 '피고인이 죄를 지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할까, 아니면 피고인이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해야 할까? 만약 후자라면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당장 범죄자가 될 수 있다. 누군가 뜬금없이 내가 자신의 지갑을 가져갔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거기서 가져가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사재판은 검사가 피고인이 죄를 지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입증책임'이다.
5. 그런데 다른 범죄와 다르게 성범죄는 내밀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하기 힘들다. 그래서 당사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 검사의 공소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것이 성범죄 재판에서 주된 쟁점이 된다.
그러므로 법정에서 변호인의 역할은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법관으로 하여금 진술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하는 것이다.
6.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은 정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주장, 피해자의 진술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럼 이러한 사실들을 가지고 법관은 피해자의 진술이 정말 믿을만 한지 판단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대법원은 위 신빙성 판단 기준에 대해 여러 가지 사유들과 더불어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적일 것'을 요구하는데 이 진술의 주요한 부분이라는 점이 참 애매하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내가 수행했던 사건에서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한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당한 일자를 1년 이상 착오하여 진술하였고 다른 진술도 몇 차례 번복하였으며, 추행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 목격자도 증인신문 과정에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진술을 번복하였다. 그러나 그 피고인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피해자가 일관되지 않게 진술한 부분은 '주요한 부분'이 아니라 신빙성을 탄핵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7. 결국 옛날과 다르게 피해자의 진술의 번복이나 모순을 찾아내는 정도로는 이제 신빙성 탄핵은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점점 변호사로서 느끼는 것은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입증책임이 전환된 것 같은 경향이 보인다는 것인다. 검사가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로 일종의 '소명' 정도만 한다면 피고인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는 이상 유죄판결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내 주변 많은 성범죄 전문 변호사들의 생각이다.
8. 법정에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밝혀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예전 성범죄 사건의 흐름이 가해자에게 유리하였던 것이 사실이며, 시간이 갈수록 피해자 중심의 사고를 법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수준이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입증책임을 뒤엎을 정도로 된다면 위험한 것 아닌가 싶은 우려가 있다.
성범죄 사건들의 양상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판결들도 아직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이 된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형사소송법의 대원칙과 실체적 진실 발견 및 피해자 보호라는 양쪽의 무게추가 균형을 이루게 되겠지만, 현재 누가 나에게 진술만으로 성범죄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내 답은 'Y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