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9일
안녕하세요. 저는 18년 동안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오랜만에 수요시위에 오니 교사가 되고 수요시위에 처음 참여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날 일본인 노신사가 연단에 서서 사과를 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의식 중에 ‘일본인들은 전쟁을 일으킨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사과하는 일본인을 마주하니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일본인들이 ‘무리’가 아닌 ‘개별적 주체’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겨울 오키나와에 다녀왔습니다. 오키나와 섬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가 피해를 입은 장소입니다. 배할머니는 1975년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혔습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입니다.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 영토로 되어 있지만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류큐’라는 독립국으로 존재하다 1897년 ‘류큐 처분’을 통해 강제로 일본 한 개의 현으로 귀속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지배에 반대한 류큐인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한 것처럼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대격전을 치릅니다. 이 전투가 비극적인 것은 ‘집단자결’로 표현되는 강제집단사가 섬 곳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의 포로가 될 경우 군사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군인에 대한 곡식 보급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오키나와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조선인이 ‘조센징’이라 불렸던 것처럼 , 오키나와인들은 ‘리키징’이라고 불리면 차별당했습니다.
현재 오키나와는 일본에 소속된 한 개의 현으로 전쟁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영토가 파괴되고 수십만 명의 주민이 희생된 피해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위치는 일본 본토와 다른 역사관을 갖게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역사교과서 서술을 지운 것처럼 오키나와의 집단자결 사건을 숨기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007년 문부과학성은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주민의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는 고교 역사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도록 했고,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11만여 명이 참여하여 '오키나와 현민 궐기 대회'를 개최하며 역사 왜곡에 강한 분노를 표출했고, 국가주의 성향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계열의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는 일본 정부가 아닌 오키나와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원 안에 있는 자료관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솔직한 서술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데, 제가 본 그대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키나와에서도 각지의 부대의 후방시설로서 위안소가 설치되어 민가 등이 이에 사용되었다. <위안부> 대부분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끌려온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부대와 함께 이동되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초석'은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오키나와 주민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여기에는 조선인 464명의 이름이 있고, 공원 한쪽에서 한국인 위령탑도 볼 수 있습니다.
여행 중에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오키나와인의 흔적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함께 대화하고 손을 잡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