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인생을 휘발되지 않게 지키는 유일한 저장소
지금의 나를 이루는 성취, 나의 가치관, 행복의 기준 같은 것들은 오로지 나의 힘으로 만든 결과값이 아니다. 그것은 아내라는 타인과 수없이 충돌하고 병합하며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 아내가 없었다면 불행했을 거라는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다. 아내가 없는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발자에게 필수 라이브러리가 빠진 코드를 실행해 보라는 말은 모순이다. 아내를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예 다른 아키텍처로 설계된 별개의 시스템이다. 여기에 우리를 반반씩 섞어놓은 아이까지 더해진 지금, 서로가 없는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가설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지금 이 행복이 상대가 나와 결혼해준 덕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팩트만 놓고 보면 진짜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다. 연애 시장이라는 테스트 환경에서 객관적인 벤치마크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은 쪽은 분명 아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에겐 과분한 사람이다. 이건 빈말이나 겸손이 아니다. 데이터에 기반한 팩트다. 그래서 나는 단지 “고맙다”는 말로 퉁치고 싶지 않다. 나는 철저한 이성주의자니까. 내가 받은 입력값이 훨씬 크기에, 내가 뱉어내야 할 감사의 출력값이 아내보다 커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감상적인 연애편지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시스템이 왜 아내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완성해 가는지에 대한 기술적인 분석 보고서다.
컴퓨터 구조에는 계층이 있다. 가장 위쪽에는 레지스터와 캐시, 그리고 RAM 같은 빠른 메모리 계층이 존재한다. 이곳은 눈부시다. 연산 속도가 빛처럼 빠르고,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번쩍이며 흐른다. 우리가 흔히 능력이라 부르는 것들, 예리한 판단력, 사회적 성취 같은 것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처리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휘발성이다. 전원이 꺼지거나 시스템에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모든 데이터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다. 혼자 사는 삶이 불안한 이유는 우리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충격 앞에서 상태값이 쉽게 초기화되는 휘발성 메모리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래에 저장해야 한다. 가장 아래쪽에는 스토리지가 있다. 조용하고 묵직하며,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날아가지 않는 영속 저장소다. 어떤 재난이 닥쳐도 이곳에 기록된 데이터는 살아남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 영속 저장소가 되어주는 일이다.
건강한 관계는 데이터베이스의 트랜잭션 안전을 보장하는 ACID 원칙을 따른다.
[ACID 원칙]
원자성(Atomicity) — 기쁨과 슬픔을 분리하지 않고 결정적 순간에는 함께 처리한다.
일관성(Consistency) — 기분에 따라 변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제나 예측 가능한 규칙과 신뢰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다.
고립성(Isolation) — 외부의 소음이 우리라는 세계의 트랜잭션을 깨지 못하게 경계를 지킨다.
지속성(Durability) — 장애 이후에도 사랑은 복구 가능한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시스템 장애를 겪는다. 복잡한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뇌의 리소스가 완전히 고갈된 날, 현관문을 여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반대로 아내가 쏟아지는 일상의 변수들을 처리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날, 아내의 시스템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 말이 줄어든 밤, 우리는 각자의 어둠 속에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연결만은 끊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묵직한 신뢰가 멈춰선 우리를 다시 복구했다. 혼자였다면 그 순간 삶의 의미는 증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지속성을 제공한다. 내가 무너질 때 아내가 나의 가치를 기억해 주고, 아내가 흔들릴 때 내가 아내의 단단함을 복원해 준다. 서로가 서로의 백업 서버가 되어주기에, 우리는 무너질지언정 소멸하지 않는다.
연애가 도파민이라는 캐시 메모리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입출력이라면, 결혼은 인생이라는 영속 저장소에 데이터를 새기는 커밋 행위다. 개발자는 안다. 코드를 아무리 화려하게 짜도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날아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 너 좋아해"라는 말은 캐시에 머무는 데이터다. 빠르고, 달콤하고, 휘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늙어갈 거야"라는 약속은 디스크에 데이터를 쓰는 행위다. 느리지만, 남는다. 그 순간, 불안정했던 너와 나는 '우리'라는 구조로 저장된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한 일상, 안정적인 커리어, 아이가 자라나는 기쁨. 이 모든 화려한 애플리케이션이 구동될 수 있는 이유는, 바닥에서 묵묵히 트래픽을 나눠 짊어지는 배우자라는 인프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화려한 프론트엔드가 되어 세상을 누비고, 다른 한쪽은 묵묵한 백엔드가 되어 뒤를 받친다. 때로는 역할을 바꾸어가며 서로의 삶을 지탱한다. 이 거대한 기반 시설 없이는, 우리라는 프로세스는 단 1초도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버그를 만난다. 경제적 위기, 건강의 악화, 사소한 말다툼과 오해들. 시스템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롤백할 것인가, 로그로 남길 것인가. 진정한 사랑은 롤백을 선택하지 않는다. 서로의 실수와 실패조차 우리의 역사로 기록하고 품어준다. "그때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과거로 되감는 대신,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서 다음 버전으로 업데이트하자"라고 말하는 것. 그 덕분에 우리는 실패한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버그를 고치며 더 나은 버전으로 진화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삶이 허무하게 증발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장 강력하고 안전한 저장 기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서로에게 하루를 전송한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확인한다. 서로의 눈빛이 확인 응답이 된다.
커밋.
저장이 완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