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31분.
경기고양경찰서 별관 지하 1층.
어제와 같은, 그리고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들어서는 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세린이 김현석보다 먼저 도착해 텅 빈 특별 진술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단말기 앞에 선 김현석이 고개를 들었다.
"재진입 요청 사유가 뭡니까?"
"오전 복원 데이터에서 누락된 핵심 변수가 생겼습니다."
"어떤 변수요?"
"추락 당시, 2층 복도에 제3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김현석의 손가락이 단말기 위에서 딱 멈췄다.
"진술입니까?"
"목격자 진술입니다. 강윤서."
김현석은 스크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정세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 진술을 변수로 얹으면, 바벨이 전체 진술 신뢰도를 자동으로 깎아버립니다. 미성년 목격자는 알고리즘상 가중치가 아주 낮게 잡히거든요."
"압니다."
"알면서도 돌리겠다고요?"
"그래도, 돌려야 합니다."
김현석은 더 토를 달지 않았다. 묵묵히 단말기를 두드려 새로운 변수를 시스템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정세린은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쇳덩이가 책상을 긁으며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오전과 똑같이 방 안을 울렸다.
정면 스크린에 갱신된 사건 파일이 번쩍였다.
[ 사건 파일 갱신 ]
BC-0316-HM-044
추가 입력: 목격자 진술 — 강윤서 (만 13세)
추락 시점 전후 복도 내 제3 인물(차민아) 존재 확인
추락 직후 차민아의 난간 접촉 상태 확인
"시작하겠습니다."
정세린은 마이크 앞에서, 오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첫 질문을 장전했다.
"추락 직전, 2층 복도에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이 서 있었습니까?"
시스템의 처리음이 돌았다. 오전보다 확연히 길고 무거운 구동음이었다.
[ 처리 중 ]
기존 복원 데이터 재분석
신규 변수 반영
화자 방향 추정 벡터 재계산
노이즈 사이로 차수연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 복원 진술 ]
"…있었습니다."
[ 고인 일치도 ] 84.3%
[ 해석 개입도 ] 높음
[ 주의 ] 단문 복원 구간 포함
정세린은 스크린으로 눈을 들지 않은 채 곧바로 파고들었다.
"누구였습니까?"
이번에는 데이터 처리음이 한층 더 길어졌다. 정면 패널의 파형이 여러 번 잘게 요동쳤다.
[ 처리 중 ]
손상 구간 재복원 시도
화자 방향 벡터 분석
주변 음압 분포 재계산
이윽고 결과값이 화면에 맺혔다.
[ 복원 진술 ]
"민아…"
[ 고인 일치도 ] 78.2%
[ 해석 개입도 ] 매우 높음
[ 주의 ]
본 복원은 음성 손상률 61% 구간에서 강제 추출된 추정값입니다.
고인 일치도는 참고 수준에 불과합니다.
단독 증거로 절대 사용 불가.
방 안이 조용해졌다. 김현석이 붉은색 경고문이 뜬 화면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일치도 78.2%에 해석 개입도 '매우 높음'이면, 실무에선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냥 심증 굳히는 참고용일 뿐이에요."
"압니다."
정세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음성 복원 구간, '또 그 계정 썼지.' 그 원망은 대체 누구를 향해 내뱉은 말이었습니까?"
처리음이 다시 맹렬하게 돌았다.
[ 처리 중 ]
발화 방향 벡터 재분석
거리 추정 재계산
기존 해석 맥락 전면 재검토
왼쪽 벽면이 켜지며 오전과는 완전히 다른 도식이 떠올랐다. 2층 복도의 3D 평면도가 열리고, 두 개의 붉은 점이 좌표를 잡았다.
[ 화자 위치 추정 ]
차수연: 중앙 난간 북측 0.8m 지점
제2 인물 추정 위치: 난간 북측 2.3m~3.1m 지점
[ 발화 방향 분석 ]
음압 벡터: 북측 방향 우세
거리 추정: 근거리 (2m 내외)
결론: 발화 대상은 차수연의 '전방에 서 있던 인물'일 가능성 우세
오른쪽 벽면에는 오전의 분석 결과와 지금의 결과가 나란히 펼쳐졌다.
[ 오전 해석 ]
발화 대상: 특정 불가 (맥락 기반으로 남편 '강도윤' 추정)
[ 재분석 해석 ]
발화 대상: 전방 근거리 인물 ('차민아' 추정)
근거: 화자 방향 벡터, 신규 목격자 진술, 거리 추정
정면 하단의 관련성 수치가 실시간으로 움직였다.
[ 행위자 관련성 재분석 ]
차민아 71.4%
강도윤 38.9%
강윤서 3.1%
[ 시스템 주석 ]
오전 분석 대비 주요 변수(목격자) 변경으로 용의자 순위가 역전되었습니다. 단, 차민아 관련 직접 물증은 현재 부재함.
김현석이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순위가 완전히 뒤집혔네요."
"네."
"그래도 직접 물증이 없다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71.4%에 해석 개입도 '높음' 꼬리표 달고는 영장 청구 어림도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정세린은 김현석의 만류를 자르듯 다음 질문을 넘겼다.
"추락 직전의 8초 구간. 그중 '마찰음'이 발생한 정확한 방향을 분석할 수 있습니까?"
김현석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찰음이요?"
"스마트 링 로컬 버퍼에 마찰음 구간이 짧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충격음이 울리기 직전입니다."
김현석이 급히 단말기를 두드렸다. 시스템이 다시 구동하기 시작했다. 정면 파형이 세 번 요동치다 멈춘 뒤, 결과가 떨어졌다.
[ 마찰음 분석 결과 ]
구간: 20:58:51 ~ 20:58:54 (약 3초)
성격: 직물 또는 신체 접촉으로 인한 마찰
방향: 차수연 전방 우측
[ 주의 ] 스마트 링 단일 센서 기반의 불완전한 추정. 오차 범위 ±40도. 단독 증거 사용 불가.
오른쪽 벽면의 평면도 위로 붉은 호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졌다. 호의 중심은 차수연이었고, 붉은 선은 그녀의 전방 우측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선의 끝에는, '차민아'의 추정 위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세린은 고요히 화면을 응시했다.
오차 범위 ±40도. 단독 증거 사용 불가. 시스템이 달아놓은 주석들은 정확했다. 이 엉성한 데이터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 오전, 이 방이 강도윤의 이름을 확신에 차서 밀어 올렸을 때, 이 '마찰음'은 방향 분석조차 거치지 않은 채 그저 추락 전의 무의미한 소음으로 뭉뚱그려 폐기되었다.
그때는 시스템도, 인간도, 그 복도에 차민아가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계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기계에게 처음부터 오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정면 패널에 최종 재분석 요약이 떠올랐다.
[ 재분석 요약 및 권고 ]
오전 1차 복원의 핵심 전제(복도 내 제3 인물 부재) 파기.
발화 방향 및 마찰음 발생지 모두 '차민아'의 위치를 가리킴.
현 단계에서 강도윤 관련성 우선 지정을 철회하고, 차민아를 제1 분석 대상으로 재지정함.
김현석은 스크린을 노려보며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오전엔 이 시스템이 강도윤을 잡아먹을 듯이 집중 조사하라고 권고했었죠."
"그랬죠."
"그래서 그 권고대로 남편을 털었고, 거기서 숨겨둔 불륜이 튀어나왔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남편의 찌질한 변명이, 시스템의 전제를 뒤엎는 트리거가 된 셈이네요."
정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상단에는 '차민아 71.4%'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오전의 '강도윤 94.2%'보다 초라했고, 밑에 달린 붉은색 주석은 훨씬 길고 지저분했다.
하지만 정세린에게 지금 이 71.4%는, 오전에 보았던 94.2%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오전의 94.2%가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만 도출된 숫자였다면, 지금의 71.4%에는 시스템이 처음에 놓쳤던 인간이 끼어 있었다.
정세린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스템은 지독하게 정직했다. 자신이 도출해 낸 숫자의 한계를 화면 하단에 늘 깨알같이 적어둔다.
오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강도윤을 94.2%의 확률로 범인이라 지목할 때도, 시스템은 분명 '실제 사용자가 명의자와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이라는 경고문을 달아두었었다.
단지 인간들이,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그 작은 꼬리표를 무시했을 뿐이다.
정세린은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았다.
"김현석 지원관님. 한 가지 더 돌려봐 주십시오."
"뭡니까?"
"차민아가 현재 이혼 소송 중이라고 했습니다. 위자료 분쟁이나, 언니 차수연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분석 축에 넣어주세요."
김현석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범행 동기 쪽입니까?"
"바벨이 쥐고 있는 건 사건의 시간, 위치, 그리고 파편화된 소리뿐입니다. 그녀가 '왜' 그 시간에 언니 앞을 막아서야 했는지는 아직 텅 비어 있으니까요."
정세린이 특별 진술실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서 막내 형사가 태블릿을 흔들며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선배! 포렌식 결과 나왔습니다."
"1층 서재 마스터 계정 접속 기록?"
"네. 어젯밤 8시 58분에 서재 데스크톱에서 마스터 계정이 실행됐는데, 접속 방식이..."
형사가 내민 화면을 정세린이 낚아챘다.
[ 디지털 포렌식 결과 ]
서재 허브 마스터 계정 실행 시 '강도윤 스마트폰 지문 인증' 병행 확인.
결론: 해당 시간 서재에서 프라이버시 모드를 실행한 것은 강도윤 본인이 확실함.
정세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도윤이 직접 켰다. 프라이버시 모드는 밖에서 엿듣는 자들을 피해 남편 스스로 켠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이십 분 뒤 2층 복도에서 자매가 마주 섰을 때 차수연이 내뱉은 그 마지막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또 그 계정 썼지."
정세린은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 화살표를 그어보았다.
'그 인간이 아래층에서 또 그 빌어먹을 계정을 쓰고 있겠지. 그리고 너는, 그 사실을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기만했지.'
어디까지나 수사관의 직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세린은 지금, 차민아가 왜 이혼 소송 중에 언니 집에 머물러야 했는지, 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매의 대화가 단절되었는지, 왜 차민아가 난간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울어야 했는지 그 퍼즐의 윤곽을 보기 시작했다.
"선배, 이제 어떡할까요?"
막내 형사의 물음에 정세린은 태블릿을 돌려주며 건조하게 지시했다.
"차민아 계좌 금융 거래 내역 전부 뽑아와. 최근 6개월 치로."
"이유는요?"
"아직 없어."
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졌다.
정세린은 복도 끝, 굳게 닫힌 특별 진술실의 회색 방음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 하루, 저 방은 세 번이나 열리고 닫혔다.
처음에는 평범한 교통사고를 가장 매끈하게 덮어버렸고, 두 번째에는 무고한 남편의 이름을 화려하게 띄워 올렸으며,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스스로의 오류를 시인하고 여동생의 그림자를 비췄다.
틀린 것은 저 차가운 방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 인간들이 손에 쥐고 있던 얄팍한 단서들이 문제였을 뿐.
정세린은 뒤돌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차민아를 다시 그 좁고 숨 막히는 조사실로 끌어내야 했다. 이번에는 시스템의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바닥을 긁어낼 아주 지독한 질문을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