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시스템 밖

by TAFO

오후 6시 17분.

경기고양경찰서 형사과 강력2팀 사무실.


정세린은 출력물 세 묶음을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쳐 놓았다. 차민아의 금융 거래 내역, 차수연의 금융 거래 내역, 그리고 차민아의 이혼 소송 관련 법원 기록 사본이었다.


막내 형사가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제가 요약해 드릴까요?"


"됐어."


정세린은 차민아의 내역부터 천천히 넘겼다.


차민아, 서른여섯. 직업 프리랜서 번역가. 월수입은 불규칙했다. 언니 차수연으로부터 정기 이체가 들어오고 있었음에도, 최근 네 달간은 지출이 수입을 훌쩍 초과했다. 변호사 수임료, 임시 거처 보증금, 그리고 생활비.


그 아래에 문제의 정기 이체 항목이 있었다.


매월 15일, 차수연의 계좌에서 차민아의 계좌로 정확히 150만 원이 꽂혔다. 이혼 소송 개시 직후부터 시작되어 벌써 열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돈줄이었다.


정세린은 이체가 시작된 시점을 다시 짚어보았다.


열한 달 전. 차민아의 이혼 소송이 시작된 시기와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두 달 전, 차민아는 형부의 수상한 프라이버시 계정을 목격했고, 그것을 언니에게 일러바쳤다. 언니는 동생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부터 냈다. 그런데도 이체는 끊기지 않았다.


사이는 틀어졌지만, 돈은 계속 흘러갔다.


정세린은 차수연의 내역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 최근 이체일은 이달 15일. 불과 사흘 전이었다. 차수연이 추락사하기 하루 전.


그런데 그 바로 다음 줄에, 이질적인 항목 하나가 붉은색으로 찍혀 있었다.


이달 15일 오후 4시 52분. 동생에게 150만 원을 이체한 지 불과 두 시간여 만에 접수된 '이체 취소 요청' 기록이었다. 은행 측 기록에는 건조한 취소 처리 결과가 붙어 있었다.


[ 이체 취소 결과 ]
취소 요청: 2026.03.15 16:52
취소 처리: 불가
사유: 수취인 계좌 즉시 출금 완료


차민아는 돈이 들어오자마자 이미 현금으로 빼내 간 뒤였다.


정세린의 펜 끝이 그 줄에서 멈췄다.


차수연이 동생을 향한 송금을 일방적으로 끊어내려 한 것이 바로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차수연은 동생에게 "네가 그때 그딴 소리만 안 했어도 이 지경은 안 됐을 것"이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그리고 20분 뒤, 두 사람은 2층 복도에서 마주 섰다.


이체 취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간 말. 그리고 복도에서의 51초.


파국은 거의 하루이틀 사이에 한꺼번에 몰려 있었다.


정세린은 마지막으로 법원 기록을 펼쳤다.


차민아의 이혼 소송 서류였다. 전 남편 측이 제출한 서류에 '참고인'으로 언니 차수연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동생의 성격 결함, 혼인 기간 중의 행태, 양육자로서의 부적합성을 증명해 달라는 노골적인 진술 요청이었다.


그 옆에 붙은 차수연의 답변은 짧았다.


차수연은 참고인 진술을 단호히 거부했다. 사유란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본인은 가족 간의 분쟁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정세린은 그 문장을 두 번 곱씹었다.


차민아의 입장에서, 저 거부는 곧 '언니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혼 소송에서 피붙이인 언니의 증언은 양육권 향방을 가를 중요한 카드였다. 그런데 언니는 그 역할을 맡기를 거부했다.


정세린은 타임라인을 머릿속으로 조립했다.


참고인 진술 거부가 먼저였다. 동생의 앙심을 달래려 했는지, 그 직후부터 매달 150만 원이라는 합의금 성격의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달 전, 동생은 형부의 약점을 잡아 언니를 흔들었다. 언니는 긁어 부스럼을 만든 동생에게 화를 냈지만, 돈줄은 끊지 않았다.


그런데 사흘 전, 언니는 갑자기 그 돈을 도로 빼앗으려 했다.


왜 하필 사흘 전이었을까. 무엇이 간신히 유지되던 균형을 깨뜨렸을까.


막내 형사가 조심스럽게 정세린을 불렀다.


"선배님."


"어, 왜?"


"차민아 씨 이혼 소송 담당 변호사 쪽이랑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늘 오전에 차민아 씨가 변호사한테 다급하게 연락을 했다고 하네요."


"무슨 내용으로?"


"소송 취하 관련 상담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갑자기요."


정세린은 대답 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소송 취하. 양육권을 포기하겠다는 뜻. 하필 언니가 죽고 난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차수연 씨 유언장이나 생명 보험, 재산 분배 관련 서류 확인했어?"


"아직 진행 중입니다."


"최우선으로 당겨서 오늘 안에 책상 위에 올려놔."


정세린은 다시 출력물로 눈을 돌렸다.


차민아의 진술에 거짓이 섞여 있다는 건 이미 분명했다. 방 안에서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만 이미 복도에 나와 있었고, 마스터 계정을 몰랐다고 했지만 형부가 그 계정을 어떻게 쓰는지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다. 게다가 윤서가 목격한 이모는 추락 직후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친언니를 난간 밖으로 밀어버렸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직 큰 간극이 남아 있었다.


사흘 전부터 가팔라진 자매 사이의 감정이 그날 밤 2층 복도에서 어떤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는지, 그것은 이 건조한 텍스트 파일들 안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정세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오후 7시 43분.
고양 장항지구 인근의 한적한 카페.


정세린이 장소만 찍어 보낸 짧은 호출 문자에, 차민아는 군말 없이 나와 있었다.


정세린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차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부르실 줄 알았어요."


"기다리기라도 하셨습니까?"


"제가 지금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차민아는 아메리카노 잔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 있었다. 조사실에서 찢어진 휴지를 쥐고 있던 것과 똑같은, 방어적인 자세였다. 머그잔 안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정세린은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차수연의 이체 취소 요청 기록이었다.


"보셨습니까?"


차민아는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이 돈, 취소하려 했던 거 알고 있었습니까?"


"알았어요."


"어떻게요?"


"언니가 직접 말했으니까요. 사흘 전 저녁에요."


정세린은 서류를 걷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사흘 전 저녁에, 언니가 갑자기 돈을 끊겠다고 한 이유가 뭡니까?"


차민아는 커피 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니가, 뭔가를 더 알게 됐거든요."


"뭘 말입니까?"


"제가 제 변호사한테 언니 얘기를 했어요. 언니가 내 양육권 소송에서 참고인 진술을 거부한 괘씸한 년이라고요. 소송 전략상 어떻게든 언니를 끌어들여야 했으니까. 근데 그 얘기가 전 남편 쪽 변호사를 타고 언니 귀에까지 들어간 거예요."


정세린은 메모했다.


차수연이 진술을 거부한 사실을 동생이 소송의 무기로 역이용하려 했고, 그것을 알게 된 차수연이 배신감에 사흘 전 이체를 끊어버리려 한 것이다.


"언니 입장에서는 동생이 끝까지 자기를 진흙탕 싸움에 끌어들이려 한다고 느꼈겠군요."


"그렇게 됐죠."


"그래서 분노해서 돈줄을 끊으려 했고."


"네."


"그래서 어제 저녁에도 '네가 그때 내 남편 불륜 얘기만 안 꺼냈어도'라며 원망을 쏟아냈고."


차민아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꽉 쥐었다.


"언니 입장,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저는요."


그녀는 목이 메는 듯 말을 삼켰다.


"저는 그냥, 다 제자리를 찾길 바랐어요. 두 달 전에도, 이번 소송에서도. 언니가 나쁜 놈한테 속고 사는 것도 싫었고, 제 소송도 이기고 싶었어요. 제가 언니한테 그 정도 기대는 할 수 있잖아요. 그게 그렇게 이기적인 건가요?"


정세린의 시선이 차민아의 손등 위에 머물렀다.


"그날 밤 복도로 다시 나간 건, 언니랑 그 알량한 돈과 소송 얘기를 마저 하려고 나간 겁니까?"


차민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억울하잖아요. 형부가 더러운 짓 한 걸 먼저 말해준 건 난데, 언니는 끝까지 나한테만 화를 냈어요. 두 달 전에도, 사흘 전에도. 바보같이 남편 편만 들면서. 그게 너무 억울해서..."


정세린은 들고 있던 볼펜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차민아 씨."


차민아가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오후에 바벨 시스템을 재구동한 결과, 이 사건에서 차민아 씨의 범행 관련성이 71.4%로 치솟았습니다."


차민아는 숨을 죽인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형부 강도윤 씨가 94.2%였습니다. 용의자 순위가 뒤바뀐 건, 어제저녁 헤드셋을 끼고 있던 열세 살짜리 아이가 오늘 오후에 저희에게 한 진술 때문입니다."


그제야 차민아의 텅 빈 눈동자에 균열이 갔다.


"윤서가요...?"


"네."


차민아의 손이 힘없이 머그잔에서 미끄러졌다.


"그 애는, 윤서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변명도, 부정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세린은 식어가는 카페의 공기 속에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가며 밤의 찬 바람이 확 밀려 들어왔다. 차민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언니가..."


처음보다 한층 갈라진 목소리였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말은 조사실에서 진술할 때보다 훨씬 느리고 무거웠다.


"저한테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사흘 전부터 계속."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도로 나간 거예요. 똑바로 말해주려고."


"뭘 말입니까?"


차민아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 듬성듬성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한산한 카페 구석에서 재즈 음악만이 무심히 흘렀다.


"차민아 씨."


정세린이 다시 한번 그녀를 압박하려 할 때, 차민아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바벨, 이라는 거요."


"네."


"그 특별 진술실에 들어가면... 진짜 언니 목소리가 나오나요?"


정세린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복원된 목소리입니다."


"그래도, 정말 우리 언니 목소리랑 똑같나요?"


"...네. 그렇습니다."


차민아는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언가를 어렵게 삼키는 표정이었다.


"내일."


정세린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내일 아침에, 제가 그 방으로 들어갈게요."


가로등 불빛이 비친 차민아의 얼굴은 단정했지만, 그 안쪽은 이미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거기서... 다 말씀드릴게요."


정세린은 카페를 나와 자신의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차민아가 끝내 복도에서 말하려 했던 진심. 억울함과 돈, 그리고 두 달치 쌓여온 감정.


그것들이 그날 밤 51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서 어떤 물리력으로 바뀌었는지는 내일 아침 그 서늘한 방에서 드러날 것이다. 온전히 드러나거나, 아니면 다시 기계의 오류 뒤로 밀려나거나.


정세린은 차 문을 열기 전, 조수석에 던져둔 파일 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수연의 이체 취소 기록. 열한 달 동안 이어진 송금 내역. 동생의 배신과 남편의 외도.


내일 그 방에 들고 들어갈 무기는 더 이상 시스템이 찍어낸 '확률'이 아니었다. 사흘 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인간 사이의 '인과'였다.


겨울의 끝자락을 닮은 매서운 바람이 주차장을 훑고 지나갔다.


내일 아침, 죽은 자의 방이 네 번째로 열린다. 이번에는 차민아가 직접 입을 열 것이다. 복원된 언니의 목소리 앞에서.


정세린은 시동을 걸며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기계가 답을 내놓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진실의 밑바닥을 보고 들어가야만 한다고.

이전 07화제7화. 다시, 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