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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Jan 18. 2024

키 재기 좋아하는 왕승희

[초등 저학년 동화]

승희는 키 재는 것을 좋아해요. 아침마다 냉장고 가림벽에 붙은 기린 그림 키재기 자에 등을 대고 재요.

“내려갑니다!”

엄마는 정말 키를 재는 기구인 것처럼 티슈상자로 머리를 툭 쳐요.

“133점…4! 3학년 평균입니다!”

승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해요.       


“키 재보자.”

학교에 가면 승희는 친구들하고 등을 맞대고 키를 쟀어요. 아침마다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키를 재는 것을 보고 담임선생님은 웃으며 생각했어요.

‘도토리 키 재는 것 같잖아? 귀여워.’

하지만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 너희들 키 좀 봐. 벌써 이만큼 컸네? 나는 열한 살인 줄 알았지 뭐야?”


승희는 키 재기 말고 다른 것을 비교하는 것도 좋아해요. 지난주에는 짝꿍 민수에게 필통 안에 있는 연필이 누가 더 많은가 세어보자고 했어요. 승희는 일곱 자루, 민수는 겨우 세 자루였어요. 다음 날 민수가 연필을 필통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이 챙겨와서는 다시 해보자 했을 때 승희는 거절했어요. 이미 끝난 경기라는 거예요.

“이번엔 누가 제일 긴 연필을 가졌는지 겨뤄보자.”

민수는 이번에도 졌어요. 왜냐하면, 승희에겐 아직 깎지도 않은 새 연필이 있었거든요. 누가 깎지도 않은 연필을 학교에 가져온단 말이에요. 승희는 무엇을 겨루어볼지 맨날 생각하나 봐요.

한 번은 친구가 샤프심을 빌리는 것을 보고 승희가 말했어요. 

“좋은 생각이 났어.”

민수는 또 무슨 게임을 제안할지 불안했어요.  

“친구들한테 샤프심을 빌리는 게임 해보자. 누가 더 많이 빌리는지 내기하는 거야. 게임 규칙은 한 사람당 한 개만 빌릴 수 있어. 시간은 학교 끝날 때까지!”

민수는 그 게임에서 기권패했어요. 왜냐하면 민수는 반에서 말을 거는 친구가 승희, 진영이, 현선이 셋뿐이거든요. 그중에서도 샤프심을 빌릴 수 있는 친구는 승희밖에 없단 말이에요. 승희도 반에서 그렇게 친구를 많이 사귀는 아이가 아니에요. 특히 키 큰 애들이랑은 말도 안 섞어요. 그런데도 승희는 민수를 이길 것 같으니까 그 내기를 하자 한 거예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이크, 셋뿐인 친구가 둘로, 아니 하나도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참아야 해요. 다들 여자애뿐이긴 하지만. 아침에 엄마가 “우리 아들, 키가 좀 컸네” 할 때 민수는 가슴이 쿵 했어요. 왜냐고요? 승희는 키 큰 애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학급회장을 뽑는 날이었어요. 

“후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요?”

교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승희는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나갈까? 으앙, 이럴 줄 알았으면 공약이나 장기자랑을 준비해 오는 건데. 후보가 한 명이면 바로 회장이 되는 거잖아.’

승희는 언제나 학급회장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어!”

선생님의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어요. 아이들이 선생님이 보고 있는 곳을 일제히 바라보았어요. 승희도 뒤를 돌아보았죠. 나를리였어요. 키가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나를리가 회장 후보에! 승희의 가슴이 더 쿵쾅거렸어요. 선생님은 나를리를 앞으로 나와 서게 한 다음 공약 발표 시간을 주었어요.


나를리 진짜 이름은 나탈리예요. 방학하기 일주일 전에 전학 왔어요. 일주일 만에 방학을 하고 다시 개학했을 때 나탈리는 새로운 아이도 아니고 친한 아이도 아닌 상태로 학급에서 지냈어요. 누군가가 그 애 이름을 나탈리 대신 ‘나를리’라고 말하자 다들 그렇게 불렀어요. 나를리는 그 이름이 더 익숙하다는 듯 받아들였고요. 선생님들만 ‘나탈리’라고 부르셨어요. 전학 온 그날 승희는 깜짝 놀랐어요. 나를리의 키가 엄청나게 컸거든요. 선생님이랑 비슷한 것을 보면 승희보다 한 뼘은 더 클 것 같았어요. 그 정도면 150은 될 거예요.  

“아이쿠”

승희는 그날 나를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어요. 이 말의 의미를 아무도 몰랐지만 그건 그 애와 친해질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안녕하세요. 저는 나를리예요. 저를 회장으로 뽑아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기자랑 없냐?”

승수가 물었어요.

“3학년 3반으로 5행시를 지을게요.”

나를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작지만 그 소리는 예쁘게 울렸어요. 마치 고요한 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처럼요.

“삼!”

아이들이 운을 떼자

“삼진아웃이에요.”

잉?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했어요.

“학!”

“학교 다니기 싫었죠.”

이번에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년”

“연속으로 실패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러자 아이들이 정말 삼진아웃으로 연속 실패한 것 같은 표정으로 다음을 외쳤어요.

“3”

“3학년 3반 회장 후보가 되었어요. 뽑아주신다면.”

“반!”

“반드시 이 어려움을 극복하겠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수군거렸고 선생님은 왜 그런지 눈가가 붉어졌어요. 선생님은 단독후보여도 지지율을 알아보기 위해서 찬성, 반대 투표를 하도록 했는데 찬성률이 100퍼센트라고 했어요. 20년 교직 인생에서 다문화가정 출신 최초의 회장이라고 담임선생님은 기뻐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얘들아, 부회장 후보는 추천을 받아볼까?”

누군가 승희의 이름을 말했어요. 

“추천 이유는 뭐지?”

“게임을 잘해요. 이상한 게임이요.”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어요. 지희, 수지, 민승, 건익이도 후보로 추천되었어요. 승희는 자신을 놀리려고 아이들이 후보로 뽑았다고 생각했어요. 나와서 공약이나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는데 승희는 그냥 인사만 하고 들어왔어요. 그랬는데도 승희가 부회장이 되었어요. 

‘부회장이라니 내가 나를리 부하야?’

승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분이 푹 꺼졌어요. 나를리는 회장이 되었는데도 기쁘지 않은지 웃지도 않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는데 아이들이 나를리 근처에 모여 앉았어요. 민수가 그중 제일 배신자예요. 맨날 승희만 보고 있던 애가 그날은 나를리를 보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손목을 내밀어 나를리의 피부와 자신들의 피부를 비교하자 나를리가 말했어요.

“내 피부는 올리브색이야.”

살짝 검은빛이 도는 게 햇볕에 예쁘게 그을린 피부 같았어요. 나를리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는데 이마에서 머리카락이 작게 곱슬거리고 있었어요.  

“승희야 같이 놀자.”

나를리가 말했어요. 나를리를 보고 있던 승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어요.

“내가 왜?”

승희가 시큰둥하게 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누군가가 말했어요. 

“승희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만 놀아. 자기가 지기 싫으니까. 키 재보고 작은 애들하고만 놀고, 공부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만 놀아.”

승희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민수와 현선이, 진영이 얼굴이 승희보다도 먼저 빨개졌어요. 승희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은 물론 목까지 빨개졌어요. 그리고 눈물이 글썽글썽해서는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승희는 해적 룰렛이 된 것 같았어요. 갈비뼈 사이마다 칼이 꽂혀요. 그 아이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씩 쿡, 쿡, 쿡, 쿡… 심장을 찔러요. 얼굴과 목만 있는 해적이 ‘펑’ 하고 솟아오를 것 같아요. 

‘정말 그런 걸까? 내가 지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정말 키 작고 공부 못하는 친구들에게 뽐내고 싶어서 그런 걸까?’  

승희는 그냥 친구들과 키재기를 하고 여러 가지 놀이를 했을 뿐인데요. 구령대에 앉아서 한참을 울고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늘 같이 다니는 진영이와 현선이가 와서 “그게 아니란 거 내가 알아.”라고 말해줬다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텐데요.

학교를 마치고 민수도 현선이도 진영이도 말없이 걸었어요.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따로 가는 것도 아닌 이상한 모습이었어요. 넷은 각자 자기 고민에 빠진 것 같았어요.


금요일 오후 자치시간에 학급 회의가 열렸어요.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 학급에서 할 행사들을 정하라고 하셨어요. 나를리와 승희는 앞에 나와서 회의를 진행했어요. 물총 놀이, 캠핑, 비빔밥 만들어 먹기, 장기 자랑하기, 실개천으로 소풍 가기, 핸드폰 게임 대회 등 재미있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어요. 

문제는 나를리가 어떤 의견에 대해 좋다고 하면, 승희가 반대했다는 거예요. 

“좀… 재미없을 것 같아.”

물총 놀이가 좋다고 하니 옷이 젖으면 여자아이들은 싫어할 거다, 했어요. 여자아이들이 듣고 보니 그렇네 하는 표정을 짓자 나를리가 칠판에 쓴 ‘물총 놀이’를 지웠어요. 캠핑을 하자 하니 선생님이 힘드실 거다 하고 비빔밥을 하자 하니 뒤처리가 복잡하고 힘들 것이며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어요. 회의가 진행될수록 나를리는 지쳐갔고 결국 정한 것은 하나도 없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어요. 

“괜찮아.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좋은 의견도 많이 나왔네 뭐.”

회의를 맡겨놓고 뒤에서 업무를 보시던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어요.      


승희는 내내 나를리를 못 본 체했어요. 어느새 교실은 나를리의 무리와 승희의 무리로 나뉘었어요. 나를리 주위에는 키 큰 아이들이, 승희 주위에는 키 작은 아이들이 모였어요. 남자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했지만요. 나를리 주위의 아이들은 승희가 지나갈 때마다 괜히 키를 재보는 시늉을 했어요. 승희의 키가 자신의 눈썹에 온다는 둥, 귀 끝에 온다는 둥… 귓속말로 나를리에게 하는 것이 승희 귀에도 들렸어요.      


아침에 학교에 왔더니 누군가 칠판에 낙서해 놓았어요. 나를리를 그린 낙서였어요. 뜻 없이 보면 재미있는 캐리커처였지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본다면 분명 상처받을 게 분명한 그림이었어요. 교실에 들어선 남자아이들은 그 그림을 보자마자 특징을 잘 잡았다며 낄낄거렸어요. 그러면서 거기에 덧대어 그림을 더 그리거나 글을 썼어요. 소심해 보이는 나를리의 말투를 놀리는 내용이었어요.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어요. 

‘쿵… 쿵… 쿵… 쿵…’

승희는 귀가 먹먹해지면서 청진기를 귀에 꽂은 것처럼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야야 선생님 오신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아이들은 마치 함께 이 일을 꾸몄다는 듯이 순식간에 칠판을 지웠어요.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앉아있었어요. 나를리가 그 그림을 보았는지 궁금해서 다들 힐끔힐끔 나를리를 쳐다보았어요. 어떤 아이들은 악당 같은 호기심으로, 어떤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지만 나를리의 얼굴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종례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이 승희에게 남으라고 했어요. 

“승희야, 이거 네가 그린 그림이니?”

선생님은 누가 찍었는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어요. 분명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지웠는데 누가 찍은 것일까요?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승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선생님도 화가 난 표정을 지었어요. 

“저는 칠판 근처에 가지도 않았어요! 분필을 만진 적도 없고 그 그림에 대해 말도 한마디 안 했어요!”

승희가 목소리를 높이자 선생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셨어요.

“그런데 왜 아이들이 네 이름을 대는 거지? 그것도 여러 명이!”

승희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말했어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승희는 눈에 눈물이 가득 찼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복도에서 승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진영이가 특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그림을 그린 사람이 진영이란 것을 승희는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진영이가 나를 위해서? 어제 내가 나를리랑 아이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말해서?’

승희는 그림을 지우고 싶었지만, 진영이가 상처받을까 봐 움직이지 못했어요. 아이들은 진영이의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진다고 싫어했어요. 하지만 진영이의 그림을 한번 본 사람은 비듬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승희는 생각했어요. 진영이는 그런 아이예요. 다른 누구하고도 놀지 않고 승희하고만 놀아요.      

교문에서 나와 길을 걷던 승희는 길 건너 공원에 나를리가 서 있는 게 보였어요. 나를리는 혼자였어요. 

“야, 이쪽으로 가자.”

승희는 길을 건너려다 말고 몸을 돌려 왼쪽 길을 따라 걸었어요. 같이 길을 건너려던 진영이, 현선이, 민수도 잠시 당황하더니 그대로 승희를 따라갔어요. 그때 나를리가 길을 건너왔어요.

“잠깐 얘기 좀 해. 둘만 했으면 좋겠어.”

승희는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를리는 혼자인데 자신은 여럿인 게 비겁한 것 같아서 아이들을 보냈어요. 나를리와 같이 길을 건너 미루나무 그늘에 왔을 때 나를리가 말했어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해? 내가 다문화가정 아이라서 그래?”

승희는 깜짝 놀랐어요. 

“그런 거 아니야.”

나를리는 뭐가 그런 게 아니냐는 듯이 쳐다보았어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건지, 싫어하기는 하는데 다문화가정 아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지?

“너는 왜 그렇게 말하는데?”

이번에는 승희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승희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나를리도 왜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승희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요.

승희가 오히려 화를 내자 겁에 질린 나를리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어요.

“네가… 네가… 사사건건 반대했잖아. 회의 시간에! 학급 행사도 그렇고, 청소 시간도 그렇고… 체험 학습에 대한 의견도 그렇고. 맨날 내가 하는 일에 반대했잖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꾸 피하고…….”

나를리는 그날 있었던 칠판 테러 사건(아이들은 그 그림에 대해 그렇게 말했어요)은 이야기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계속 울었어요. 승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어요. 한숨을 쉬고, 이마에 손을 얹고, 얼굴에 부채질했어요. 

“아니, 억울한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선생님은 오늘 나보고 칠판 테러를 했다고 하질 않나. 아이들은 하고 싶지도 않은 부회장을 시켜놓지를 않나. 네 친구들은 나한테 왜 그러는데?”

승희도 생각해 보니 억울한 게 한둘이 아니어서 소리를 질렀어요. 지나가던 아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봤어요. 분홍색 학년 티를 입은 1학년 꼬맹이들이 주위에 모여들기까지 했어요. 나를리는 커다란 키를 해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끝도 없이 울었어요. 나를리 콧물이 줄줄 흐르자 그제야 승희는 휴지를 꺼내어 줄 생각이 났어요. 나를리가 “팽-”하고 코를 푸는 동안 승희는 모여든 꼬맹이들을 쫓았어요.      

승희가 나를리를 피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같이 회장, 부회장 하는 것도 맘에 들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 애를 이렇게 아프게 할 만큼은 절대 아니에요. 그건 확실해요. 승희는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 입을 열었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해 볼 테니까 울지 말고 잘 들어.”

나를리가 눈물을 뚝 그치고 승희를 바라보았어요. 둘은 한참을 서 있었던지라 다리가 아프고 지쳐서 나란히 벤치에 앉았어요.

“나는 괜히…”

여기까지 이야기해 놓고 나를리를 힐끔 보았어요. 그리고 한숨을 한 번 쉬고 나서 말했어요.

“나는 괜히 나보다 키 큰 애랑 같이 있으면 힘이 빠져. 입고 있는 옷도 별로인 것 같고, 내가 하는 말도 바보 같아져. 웃을 때 표정도 이상한 것 같고… 세상에 누가 그런 기분을 좋아하겠어? 그래서 그런 거야.” 

나를리의 눈물은 이제 완전히 말랐어요. 

“너한테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너를 아프게 하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나를리는 승희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럴 수 있다는 표정이었어요. 키 때문에 그런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지만요. 나를리가 커다란 눈을 들어 말했어요. 

“나도 너처럼 약점이 있어.”

나를리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마카로니처럼 동글동글 말린 나를리의 곱슬머리가 승희의 눈에 들어왔어요. 

“야구 경기장에 가면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잖아. 이기라고 응원하고 이긴 팀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그런데 나는 맨날 지고 있는 팀만 본다. 그래서 경기가 끝나면 삼진아웃 당한 것처럼 슬퍼져. 야구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그런 식이야.”

“아, 삼진아웃!”

승희는 회장선 거에서 나를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그럼 ‘학교 가기 싫었어’는 뭔데?”

나를리는 지난 학교에서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승희는 괜히 마음이 아렸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고작 ‘키’ 때문에 나를리를 멀리해 괴롭힌 것이 승희는 부끄러웠어요.      


‘키가 크고 작고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전학 오자마자 네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늘 지는 팀만 본다고 했잖아. 교실에서도 누가 약한 아이들인지 한눈에 알 수 있어. 진영이, 현선이, 민수. 물론 넌 그 애들이랑 억지로 노는 건 아니야. 넌 진영이가 그림을 잘 그려서 좋아하고 민수가 너그러운 아이라서 좋아해. 현선이는 말이 없고 새침하지만, 글을 잘 쓰지. 넌 남들은 모르는 점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어.”     

승희는 눈물이 핑 돌았어요. 자신보다 못난 아이들하고만 논다는 어떤 아이의 말과 남들은 모르는 특별한 점을 알아봐 준다는 두 가지 말 중 어느 말이 진실일까요? 

‘이제야 알겠어. 두 사람 말이 다 옳아. 나는 나보다 키가 작은 아이들하고만 놀았던 것 같아. 하지만 그 애들이 공부를 못해서 논다는 말은 틀린 말이야. 그 애들은 키는 작지만 숨은 매력이 있는 아이들이었어. 나처럼! 그래서 우리가 친구였던 거야!’

미루나무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어요. 승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아이들은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고 몇몇만 공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승희가 먼저 일어났어요.

“키 큰 애랑은 친구가 되기 힘들었는데 한번 놀아보자.”

나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어요. 승희는 이제 키는 크지만 숨은 매력이 있는 친구가 생겼어요.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다음날 승희는 진영이랑 같이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조회 시간에 아이들 앞에 나와서 사과했어요. 승희가 나를리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그것이 진영이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 진영이는 나쁜 뜻이 아니라 승희를 기쁘게 하려고 그림을 그렸던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사과하려고 해. 미안해. 내 행동이 누군가를 아프게 했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아이들이 박수를 쳐주었어요. 나중에 그림을 그렸던 남자아이들도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나도 사과할래. 나도 장난으로 그런 건데 진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재미있다고 놀리는 건 안 좋은 거야.” 

나를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은 자기 자리로 들어가는 승희와 진영이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씀하셨어요.

“이제 곧 운동회야. 우리 학교 운동회에 치어리딩 있는 거 알지? 회장, 부회장이랑 열심히 준비하길 바란다.”

선생님은 그림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으셨어요.      


일주일째 방과후 학교 앞 공터에 있는 배드민턴장에서 모였어요. 치어리딩은 나를리가 잘 가르쳐주었어요. 스피커도 가져오고 안무도 두 개씩이나 준비해 왔어요. 평소 얌전하던 나를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나를리가 맨 앞줄에 서서 설명하고 승희는 맨 뒷줄에 서서 아이들이 처지지 않게 살폈어요. 아이들이 셋씩 넷씩 모여서 헷갈리는 부분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어요.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승희에게 나를리가 다가왔어요. 승희가 자리를 옆으로 내어주며 말했어요.

“애들 생각보다 잘하지 않아? 이 정도면 우리 3등 안에 들 수 있을까? 아차! 너 경쟁하는 거 싫다고 했지? 미안.”

승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나를리가 웃으며 말했어요.

“아냐, 나도 이제 겨루는 거 싫어하지 않아. 열심히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 나는 우리 반이 1등 했으면 좋겠어.”

“나는 열심히 하다 보니 이기고 지는 것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던데. 그냥 이렇게 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 흐흐흐 우리 서로 바뀐 것 같다.”

나를리와 승희는 서로를 보고 웃었어요. 

‘뭐 아무려면 어때? 둘이 친구인 게 중요하지.’

승희가 생각했어요. 그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회장, 부회장이 연습은 안 하고 놀기 있냐?”

민수가 웃으면서 말했어요. 민수도 이제 남자아이들과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보기 좋았어요. 진영이는 자신이 그린 학급 응원 포스터가 어떠냐고 스케치북을 보여주었어요. 나를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탄했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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