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가 친구를 기다리느라 1층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김환기의 화보집이 있었다. 그의 초기작부터 마지막까지 순서대로 작품들이 있는 것을 서서히 넘겨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그림들과 그 이전의 그림, 그리고 그 이후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 느낀 점을 적으려 한다.
1. 내가 아는 그의 그림은 당연히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다. 나에게는 제일 잘 알려진 그림.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지라 늘 색깔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들이 있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구도는 주로 여백을 좋아한다. 너무 복잡한 선은 원치 않는다. 흉한 것도 싫어한다. 그것이 비록 삶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이 그림을 볼 때도 그 미세하게 변해가는 푸른색 계열의 점점들이 마치 파편화된 우리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괜히 그 앞에 서서 점들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좀 놀라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사람들은 이 그림을 왜 좋아하는 걸까, 궁금했다. 애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느끼는 교감 같은 것 말이다.
2. 그 이전의 그림은 추상화 이전의 그림들이다. <매화와 항아리>는 요즘으로 치면 톤다운된 블루를 배경을 색칠하고, 톤온톤으로 부드럽게 변화를 꾀했다. 그리고 따스한 연분홍빛 매화를 듬성듬성 그렸다. 아, 딱 내 스타일이었다. <항아리>는 그보다는 더 단순하지만 색감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붙잡았다. <항아리와 매화>는 휘영청 밝은 달을 닮은 항아리를 배경으로 점점이 붉은 매화가 단아하게 맺혀있었다. 이후 항아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모두 마음에 들었다.
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후의 작품.
어느 순간 화가의 점찍기 화법(내가 명명한 것이다.)은 너무 잘아진다. 그 점이 더 작고 화폭은 너 넓어진다. 작업량은 숨이 막히게 많아진다. 그는 고개를 더 숙여야 했을 거고, 더 손가락질이 섬세해야 했다. 그리고 점과 점 사이의 경계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왜?
파편화.
그는 자신의 예술성이 인정받으면서, 아니면 자신의 예술성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서 선을 넘었다.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는 기분 좋은 상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도 잘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너그럽게 잘 들을 수 있는 그 풍성함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작업만 남았다. 혼자서 부르는 노래다. 나는 너무 촘촘해져 버린 그의 그림 앞에서 속상했다. 제 속 짚어 남 말한다고 그건 아마도 내 삶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