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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구두를 신은
Feb 28. 2024
한해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면 교무실은 그야말로 폭탄 맞은 것처럼 어마무시한 쓰레기더미가 된다. 갈아도 갈아도 끝이 없는 종이 파쇄물들. 아이들이 낸 서류들, 아이들이 제출한 수행평가들, 출판사에서 참고하라고 보내준 도서들, 업무에 사용된 서류들. 대부분은 그해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엄청나게 중요한 것들이다. 생각해 보라. 학생이 제출한 수행평가 종이 한 장이라도 없어지면 큰일이다. 그건 성적과 관련된 것이어서 그것이 비록 허접하게 이름만 쓴 것이거나, 한 줄이라도 쓰라고 하면 애교로 선생님 사랑해요를 쓴 것이거나 엄청나게 중요한 성적 관련 서류이다. 그러나 성적처리가 다 되고, 아이가 성적일람표에 서명을 하고, 성적표가 나오고, 한 학기 성적 마감처리를 나이스에서 누르면 모든 서류는 학생들에게 돌려주거나, 파쇄하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서류를 묶어두었던 클립들만 무더기로 남는다.
파쇄한 종이가 담긴 비닐봉지를 묶어서 내놓고 뿌옇게 먼지 묻은 손으로 클립들을 정리하면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인생, 남는 건 클립뿐이네?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은 어떻게 그 애들에게 기억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어서 서글프고 아이들이 날밤을 새면서 준비했던 수행평가를 갈면 그들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서 서글프다.
하지만 가끔 내게 남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아, 그거...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아이들이 낸 글들에는 가끔 내 마음을 울컥하게, 혹은 내 마음을 우뚝 서게 하는 작품들도 있다. 정리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휘리릭 갈아버렸던 그 글귀가 못내 아쉽고, 그 끝자락이 어땠었는지 괜히 생각해 보게 되는 밤이 있다.
한번은 문학작품창작대회에서 '삶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라는 주제를 낸 적이 있었다.(물론 다른 주제들도 여럿 있어서 학생들이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힘든 일이 있어서 정말 그 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어떤 일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삶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를 글로 썼는데 나는 그 아이들이 작은 현자처럼 느껴졌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아마 그것은 잠시 쉬어가라는 뜻일 거라고 조언한 아이가 있었다.
이번에는 넘어져서 아프겠지만 다음에 또다시 돌부리를 만나면 넘어지지 않는 지혜를 얻게 될 거라고 다독이는 글도 있었다.
인생 남는 것은 클립뿐이지만 마음을 울렸던 몇몇 글들과 그 글을 썼던 수줍은 아이들의 표정은 잊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