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오는 것만도 고마워

- 0엽이 이야기

by 향기로울형

가끔 무심코 뱉은 내 말이 상대에게 쏙, 들어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엽이한테 내가 한 이 말도 그렇다.

“와 줘서 고맙다.”

4교시가 끝난 그 시각에 그 애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내 이놈의 자식을 몽둥이로 한 대 후려칠까, 너는 일주일 동안 벌청소야라고 할까, 교무실로 따라와 할까 했다. 그 모든 것이 보통은 내가 뱉는 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은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으니 ‘야, 너는 학교에 밥 먹으러 왔니?’ 했어야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다.

“아이구, 와 줘서 고맙다.”

물론 내 뇌리에서 출발했던 이 말의 분위기는 이런 것이다. 이놈의 자식 너 이렇게 살래 하는 식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 그런데 내가 말투를 이상하게 해서 그랬던 것인지 어쨌는지 이 말은 뜻밖에도 이 아이의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 표정은 나에게 이렇게 해석되었다.

‘아, 선생님, 나를 좀 아시네. 내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학교에 오기 싫었는지, 얼마가 오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왔는지 좀 아시네.’

그래서인지 따라오라는 말에도 순순히 졸래졸래 교무실에 따라왔다.

“왜 늦었는데?”

아이의 표정과 행동이 순하니 내 질문도 따라 부드러워졌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거다. 엽이는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다. 생계가 녹록지는 않아 보였다. 게다가 일 년 전에 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어머니는 일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엽이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도 은근히 집안 살림에 들어가는 눈치다. 지각한 이유는 전날의 고단한 아르바이트로 눈을 떠보니 이미 10시가 넘어있었다고 한다. 사복을 입은 이유는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지 교복은 빨래통에 구겨진 채로 들어있더란다.

엽이는 아르바이트 경력이 많아 시급이 센 알바를 한다. 바로 초밥 뷔페. 경력이 많은 만큼 홀에서 일어나는 일도, 주방에서 필요한 일도 빠삭하다. 그러다 보니 뺀질거리는 이모님들과 가끔 갈등을 빚는 것 같았다. 이모님들이야 허리도 안 좋고, 손목도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나 건강한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시급은 더 받으면서 일은 자신보다도 한참은 못하는 얄미운 이모님들 뒤치닥거리로 인해 간밤의 알바가 유독 험하고 힘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그랬다는 거다. 그랬는데 학교를 온 거다. 터벅터벅, 사복을 입고, 평소 유지해온 가오가 있으므로 구겨진 교복은 말이 아니지, 그래서 사복을 입고 온 거다. 혼냈으면 혼냈지 반길 선생 없는 학교에 터벅터벅 들어왔는데 그때 복도에서 만난 선생님이 이렇게 인사하는 거다.

“와 줘서 고맙다.”

그러니 그 말이 쏙, 마음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지각하는 아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게으름뱅이,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엉터리가 아니라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는 전제를 우선 적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실천이 잘 되었는지는 묻지 마시길.


이야기 나온 김에 이 친구에 대해 하나 더. 나는 임용고시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서원 기도를 했다. 교사가 되게 해주시면 아이들의 성장 외에 다른 야망을 품지 않는 교사가 되겠다고. 그 끝에 교사가 된지라 나는 아이들을 공부 못 시켜서 안달을 했다. 시험을 앞두면 담임 재량 이벤트로 성적 진보상을 만들었다. 자신의 중간고사 평균 점수에 비해 기말고사 평균 점수의 상승폭이 가장 높은 사람 문화상품권 2만원, 자신의 학급 내 등수를 반 토막으로 낸 사람은 문화상품권 1만원(2등이 1등으로 올라가도 당첨, 20등이 10등 이내로 올라가도 당첨!), 또 모둠을 짜서 모둠별 평균 성적이 제일 많이 오른 팀은 아웃백 회식. 그해 아이들은 워낙 으샤으샤 공부도, 노는 것도 잘하는 아이들이라 이벤트 내용을 발표했을 때 오, 해보자 하는 분위기였다. 꾀 있는 아이들은 전략을 짜기도 했는데 아웃백 회식이 걸린 모둠별 대항은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는 못하는 아이가 더 유리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잘하는 아이는 점수가 올라봤자니까. 그렇게 해서 똑똑한 몇몇 남자애들이 엽이를 조원으로 영입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이었는데. 나는 ‘그거지!’ 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서로 도우면서 공부도 하고 사이도 좋아지렴. 그 전략은 제대로 먹혔다. 맨날 수업마다 자거나 졸던 엽이가 조원들을 위해서 공부를 한 것이다. 물론 체육 한 과목만. 그런데 엽이가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바람에 정말 열심히 했던 다른 조들이 무색하게 엽이네 조가 아웃백 회식권을 받았다. 물론 그 조 아이들도 열심히 하기는 했다.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으면서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스테이크야 부모님과도 먹겠지만 뭔가 경쟁에서 이긴 승리의 맛이 있겠다. 나도 기뻤다. 일등공신 엽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먹기 시작하는 친구들과 엽이의 씩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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