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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Aug 18. 2023

일몰 1

선아는 하자 있는 아이랬다.

어느 밤 잠결에 일어나 보니

잠자리가 비어 있었다던

새벽녘에야 흙이 묻은 발로

문턱 어디쯤에서 잠들어 있었다던

그러다가 홀연히 떠나버렸다던

하자 있는 며느리의 딸

그것이 선아였다.


할머니는 선아의 오빠를 대들보처럼 여겼다면 선아는

밥하고 설거지하는 식모쯤으로 여겼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쌀을 씻을 때

흘러가는 쌀을 잡지 못한 것을

분통해하며 밥도 축내는 것이 쌀도 못 씻는다며

삭정이처럼 마른 손으로 문턱을 잡고

선아의 뒤통수를 눈으로 갈겼다.


분이 목구멍에 차서 목소리를 아무리 낮추어도 칼날이 튀어나왔는데

옆집에 사는 선아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 심장에도 몇 날 박혀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선아를 누추한 내 다락에 불러 낡은 창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날은 눈이라도 온 것처럼 눈부신 날이었다.

창문은 이웃집 기와지붕과 맞닿아 있었다.

"이리 와"

경사진 지붕에 발을 대고 걸음마하는 아이처럼 걸으며 말했다.

지붕 아래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겠지. 도둑고양이처럼 지붕 위를 걸어 다니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세 걸음쯤 걷고 뒤돌아서 말했다.

"너도 걸어봐"


선아는 걷지 않았다.

겁 많은 나처럼 굴지 않았다.

그애는 밟지 못한 미지의 영토들을 모두 정복한 전사

소리도 없이 겁도 없이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다.

그때 알았다.

상처 입은 영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은 아름답다는 것을


"돌아와!"

겁에 질린 내가 방에 들어와 외쳤을 때 밖은 환했고 방안은 어두웠다.

선아는 갑자기 내 품을 파고들었다.

이제 막 솟기 시작한 내 가슴을 더듬으며 선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내가 놀라 그 애를 밀쳤을 때

선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반기는 사람 없는 제 집으로 후닥닥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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