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을 쓴 마지막 지도자
광종에서 장량을 베고 대승한 황보숭은 병력을 정돈하고 병사들을 쉬게 한다. 큰 승리로 인해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아직 장보가 하곡양에서 10만 군세로 버티고 있고, 황보숭의 병력은 대병을 상대하였기에 1만 여 규모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정공법으로 맞붙기에는 너무 큰 병력 차이였다. 그 때, 치소를 빼앗기고 도망간 거록태수 곽전이 인근에서 관군들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황보숭은 즉시 곽전에게 사람을 보내 합류를 청하니, 곧 곽전이 군사 5천을 끌고 나타났다.
“군후*80의 활약은 내 익히 들었습니다. 장량을 토벌하신 덕분에 다시 이렇게 관군들을 집결 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언제든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부군*81께서 오시니, 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10만 병을 거느리고 하곡양에서 농성 중인 장보를 토벌할 계책을 세우기 시작한다. 일전에 동중랑장 동탁이 하곡양에서 장보의 계책으로 패한 적이 있기에 완벽한 작전이 필요했다. 고심하던 곽전이 말을 꺼낸다.
“불은 어떻습니까? 일전에 중랑장께서 화계로 파재의 대군을 크게 격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바람의 때가 맞았기 때문이오.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니, 큰 일을 날씨에 기대어 결정할 순 없소.”
“그렇다고 정공법으로 상대하기엔 적의 수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흠... 바로 그것이오. 불이 안 되면 물이 있지 않소!”
“물이라! 계책이 있으시오?”
“해하의 물을 끌어다 저 성에 퍼붓는 것이오.”
“그게 가능한 일이오?”*82
“힘쓰는 장사 5천을 은밀히 차출하여 강에 둑을 쌓고 땅을 파서 물줄기를 바꾼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오.”
의기투합한 그들은 특히 힘쓰는 병사들을 별도로 모아, 모래주머니를 만들고 해하를 메꾸는 동시에, 일부는 하곡양의 성을 향하는 물길을 파기 시작했다. 땅이 어느 정도 파지자, 장정들이 만들어놓은 모래주머니를 일거에 물가로 날라 둑을 만들고, 물을 가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물은 성을 향해 파놓은 곳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물의 기세가 성에 닿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은 한 차례 성의 서문을 때리더니 곳곳의 틈새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성 안 사람들의 발에 물이 차이자, 이를 본 황건적 병사들은 급히 장보에게 보고한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홍수입니다! 물이 들이차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늘이 이렇게 맑거늘!”
“모를 일입니다! 성 내가 쑥대밭이 되고 있습니다!”
장보가 급히 아문을 나와 성 내를 둘러보니, 과연 그 말대로 물이 사람들의 발꿈치 이상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배라면 물을 퍼낼 수 있었겠지만, 성 내의 물을 성 벽 바깥으로 퍼올리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에 불과했다. 물길은 이윽고 사람들의 무릎을 칠 정도까지 차올랐고,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났다.
한 편, 바깥에서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곽전이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물길이 생각보다 세지 않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한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요. 적들은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혹시 물길을 하나 더 트시려는 겁니까?”
“아니오. 지켜보시오.”
황보숭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며 군영으로 들어간다. 반면, 곽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성을 바라보니,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그 아래 적막 속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성내 황건적들 사이에는 한바탕 큰 소란이 나고 있었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 난 것이냐?”
“저각의 군량이 모두 상했습니다!”
“모두 물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옮겨놓지 않았더냐?”
“물이 너무 급하게 들이쳐 모두 옮기진 못한데다, 옮겨놓은 군량들도 습기로 인해 이미 상당수가 썩었습니다!”
“가용한 식량이 며칠 분이나 될 것 같으냐?”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방패 역시 대부분이 상하여, 화살 한 발조차 막을 수 없게 되었고, 말을 먹일 건초도 모두 상했습니다!”
“당장 성내 모든 대소방들을 소집하라!”
성 내의 소란은 황보숭에게도 보고되고 있었다. 그는 때가 되었다는 듯이 곽전을 불러 절도를 내린다.
“세작의 보고에 의하면 적들이 오늘 밤 움직일 것 같소.”
“적들이 야습을 할 거라는 거요?”
“그렇소. 물과 습기로 인해 적들의 군량이 모두 썩었으니*83, 도리가 없지 않겠소?”
“과연 중랑장은 하늘이 내린 지휘관이오!”
“아직 이긴 게 아니오. 부군께서는 활 잘 쏘는 자들 2천을 추려 물이 닿지 않는 곳에 매복하시오. 그리고 성문이 열리고 적들이 움직이면 일제히 사격하시오. 적들의 방패는 젖어 그 역할을 못할 테니, 그들은 모두 화살 밥이 될 것이오. 그리고 별부사마 1인과 함께 2천 병력으로 반대편에 매복했다가 성을 나오는 적들 측면을 치도록 하시오.”
“기병이 좋겠소?”
“아니오. 물길로 인해 땅이 와지*84와 같으니 기병은 적합하지 않소. 보병대를 꾸려야 하오.”
늦가을의 바람만이 새벽의 고요함을 때리고 있을 무렵, 성문이 조용히 열리고, 성 안팎으로 고인 물길을 밟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진다. 이윽고 수 만의 황건적 병사들이 성문을 나와 도열하니, 어둠 속 그림자들은 마치 지옥문에서 나온 악귀들과 같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굶주렸고, 적들의 식량을 탈취하여 배불리 먹을 생각 뿐인, 어찌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만이 남아있는 야수들과 같았다. 이윽고, 황건적 마지막 지도자의 명령이 적막을 찢는다.
“돌격하라! 적들의 군영을 점거하라! 그 곳에 식량이 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손에 닿을 듯 한 관군의 진영. 그 때였다. 적막의 고독을 품던 하늘에 한 줄기 불화살이 쏘아 올려졌다. 장보는 자신의 머리 위 높이 솟아오르는 불화살을 보며 한탄한다.
“저건... 표적을 알리는 화살이다.. 모두 퇴각하라 ! 성을 가로질러 북문을 통과하여 그대로 달려라!”
어차피 지킬 수 없는 성. 이대로 포위당하면 하루도 못 버틸 것이었다. 장보는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유주 일대에서 병사들을 재규합하려 한다. 그러나 적들의 화살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적들이 쏘아올린 불화살 밑으로 수천 개의 화살이 날아드니, 장보와 그 군대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일단 화살을 피해라! 성에 들어가야 한다! 성을 가로질러 북문으로 나가라!”
장보의 외침에 남문은 서로 들어가려는 황건적 병사들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살과, 쌓이는 시체들로 성문은 발 디딜 곳조차 없게 되었다. 장보는 다급하게 산더미 같은 시체를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간 후, 북문으로 도망한다. 장보가 뒤를 돌아보니, 태반이 성문을 넘지 못했고,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수백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은 급하게 마굿간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말을 잡아타고, 북문으로 향한다.
“적들이 추격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병사들의 시체로 남문이 막혀서일 것이다. 성은 내어준다. 우린 유주로 갈 것이다.”
이어, 북문을 지키던 소수 병사들이 퇴각에 합류하니, 그들은 성을 등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건 매복중인 곽전과 그의 병사들이었다.
“장보는 누구인가? 날도 쌀쌀한데 어서 따뜻한 관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가?
장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복병들이 도망 중인 황건적 패잔병들의 측면을 파쇄하기 시작한다. 굶주림과 두려움에 남아있는 사기라고는 모래알 하나만큼 조차 남아있지 않던 황건적들은 싸우길 포기하고 여기저기 흩어지니, 곽전군은 도망가는 황건적들을 도륙하기 바빴고, 장보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무기를 땅에 던져버린다.
이렇게, 황건적의 마지막 지도자 장보는 생포되었다. 장보의 생포 소식을 들은 황보숭은 급히 하곡양을 점거하고, 그들을 기다린다. 아직도 개울만한 물길이 흐르는 하곡양의 성. 포박된 장보가 끌려나온다.
“네놈 형제들의 죄가 크다. 죽어서도 갚지 못할 죄라는 걸 알고 있느냐?”
“닥쳐라! 네놈들이 귀신으로 모셔놓고 섬기는 유철*85이라는 자 만하겠느냐?!
황보숭의 질책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무제의 휘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장보를 보고 제장들이 화들짝 놀란다.
“아니... 저놈이..!”
황보숭은 수군거리는 주변을 만류하고, 말을 잇는다.
“네 놈을 살려둘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 것이다. 마지막 전할 말이 있느냐?”
“내 비록 관군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나, 네 놈들이 모시는 유씨들이 도륙한 바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나와 내 형제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그저 패했다는 것 뿐이다.”
“황실에 대항한 자들은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질서 없이 이 큰 나라가 어떻게 운영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백성들의 목숨과 안위를 담보하는 질서라면 파괴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네놈들은 백성들을 구한다 해놓고 도리어 그들을 약탈하지 않았느냐?”
“그들의 목숨을 빼앗진 않았다. 그저 재물을 통해 작은 수고를 요구했을 뿐이다.”
“아니다. 많은 이들이 네놈들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네놈이 비록 백성의 살육을 금했다 하더라도, 위엄 있는 질서가 없었기에 네놈의 부하들이 살육을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겠느냐?”
장보는 설전 아닌 설전에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베어라. 쉬고 싶구나.”
이어, 장보의 목이 잘리고, 그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졌으며, 수만의 황건적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흙을 덮으니, 십리 밖에서도 보일 산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각 마을에는 하나의 노래가 유행가처럼 불려지기 시작한다.
큰 난리에 마을은 불타 사라지니
어미는 자식을 잃고 아내는 남편을 잃었네
그러나 오직 숭이 다시 평화를 주었네
탁송지주
*80 제후를 높여 부르는 호칭.
*81 태수를 높여 부르는 호칭.
*82 실제로 훗날 조조가 여포를 공략할 때 기수와 사수의 물을 끌어 하비성을 함락했다.
*83 습기로 인해 곰팡이가 핀 것이다.
*84 일종의 습지.
*85 한 무제의 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