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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루 Aug 29. 2024

서른의 감상, 나의 N번째 사춘기에게

영화 <인사이드 아웃2>

1. 근황

 새 업무를 맡은 뒤 벌써 하나의 분기가 흘렀다. 회사에서는 이제 때가 됐으니, 본인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평가가 적절한지 면담도 하겠단다. 상사 앞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막막할 따름이다. 한 분기라고 해 봤자 고작 3개월인데, 그동안 내가 뭘 얼마나 잘했어야 하는 걸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다 가 버렸는데, 어쩌면 좋지?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그것을 주위에 들키기 싫어서 안달복달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일을 못 하는 사람이었나, 아닌데. 그래도 나름 잘했던 것 같은데. 곧잘 하니까 새 업무도 맡을 수 있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발전이 더디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여전히 무언가에 서툰 나를 견디기는 쉽지 않다.


2. 선망

 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는 참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침을 흘리며 볼 만큼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 ‘라일리’의 머릿속 본부에는 여러 가지 감정 캐릭터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등장한 감정 캐릭터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로 총 9개의 핵심 감정을 표현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라일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라일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대입할 수 있고, 그것이 이 영화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라일리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머리로는 알겠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 가득한 아름다운 메시지가 내게도 전달이 됐다. 그러나 내 안에는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없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떠돌았다. 나는 늘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욱 신경이 쓰였고,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의 기본값이라고 여겼다. 영화에서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모두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 말이 맞을까?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내 안에 있는 것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이렇게 자주, 못나게 만들 수가 있을까. 내 감정들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3. 사춘기

 <인사이드 아웃2>는 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의 감정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이 소녀는 여느 청소년들이 할 법한 고민에 빠진다. 절대 사이가 멀어질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중학교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이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새로운 친구를 못 사귀게 될까 두려움에 떤다. 이때 불안이라는 캐릭터가 주도권을 가지고 와서 라일리를 움직이는데, 뭔가를 잘하려고 할수록 친구들과는 더 멀어지고, 어쩐지 모든 일이 엉망진창 꼬여버린다. 여러 가지 변화 끝에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라일리의 자아정체성마저 흔들리고 만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내 심신이 조금 지쳐서 흔한 사춘기의 증상을 잘 표현했구나, 정도에서 감상이 그쳤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이 이야기에 내 상황을 대입하게 되었다. 이 나이에 말도 안 되지만, 난 요즘 N번째 사춘기를 겪고 있는 듯하다. 라일리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비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다녔다. 사람이 새로운 일 앞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내가 새 업무 앞에서 불안하고, 과부하가 걸려 어찌할 바 모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영화 캐릭터를 보면서는 적절한 평가가 쉬운데, 왜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이다지도 더디고 지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다행히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 곁에 두면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있으면 한숨처럼 칭얼거림이 튀어나오는데, 최근에 내가 내뱉고도 놀란 말이 있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그래서 힘들어요.” 

대화의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말하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잘하고 싶구나, 그래서 늘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자기 연민도 참 큰 병이다.’

‘힘들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며칠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다시 드는 의문, 내 속에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는가? 그럼 어째서 이런 나를 방치하는가?

 하지만 이 일련의 문제들이 내가 사춘기를 겪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다 큰 성인이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징그럽고 우습다만,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시기가 내 세상이 더 넓어지는 분기점이라면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지금을 잘 보낸다면 나는 조금 더 성숙한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이 어렵지 한 두 번 경험하고 나면 뭐든 쉬워지기 마련이다. 짧은 다리로 가랑이 찢어지게 달리는 건 당연히 힘든 일이다. 힘들어서 힘들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조차 미워하는 마음은 너무 가혹하다. 왜 이리도 내가 내게 잔인하게 굴지 못해서 안달인지. 징그러워도 이를 사춘기라고 여기고 살살 달래줘야 하지 않을까.


4. 불안

 정신과에 가면 늘 들었던 말, 나는 불안의 정도가 심한 사람이란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났을 수도 있고, 성장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다. 중요한 건 내가 불안함이라는 감정에 잡아먹혀 무수히 많은 날을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이다. 무언가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 좋은 감정이 끝나는 게 두려워 그 마음을 회피하고, 더는 마음을 키우려 하지 않는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힘든 감정 역시 내가 실패할 경우가 떠올라 불안해서 드는 마음이다. 어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극도로 긴장해 모든 걸 버리고 도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인사이드 아웃2>에서 나온 불안이라는 감정 또한 나를 사랑해서 존재한다고 한다. 믿어도 되는 걸까.

 당연하게도 ‘감정’에는 감정이 없겠지만, 이 영화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불안’이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플랜A부터 Z까지 준비했지만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외부의 상황은 늘 유동적이고 철저히 대비할수록 예상외의 일이 발생했을 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공황에 빠진 불안이의 모습은 잘하고 싶어 버둥대는 나를 보는 듯해 안쓰럽고, 직면하기 힘들었다. 아마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거나,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불안이의 모습에서 본인을 보았을 테다. 만약 한 인간에게 불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세월과 주변 사람들, 환경에 휩쓸려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떠다니게 될 것이다.

 불안해서 좀 더 공부하고, 불안하니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불안하니 뭐든 연습하고 준비할 수 있다. 이때까지 불안이라는 감정을 날 추하게 만드는 악의 축이라고 여겼지만, 불안이 없었다면 지금 이 정도로 내 몫을 하며 살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크게 여운이 없었지만, 불안이라는 캐릭터가 자꾸만 내 마음을 붙잡았던 건 내가 날 사랑한다는 미약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껄끄럽기만 했던 이 감정 역시 내가 나를 방치하지 않기 위한,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였나보다. 나에게도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 N번째 사춘기를 지나며 드디어 깨달았으니 오늘 난 어제보다 성숙에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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