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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시작하는 한글공부

서른의 발견

by 시루

삼십 년 넘게 부산에 살고 있다. 부산은 눈이 안 오기로 유명한 도시다. 내가 이 도시에 사는 동안 눈이 쌓일 정도로 많이 내린 건 열 번도 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하늘에서 비인지 눈인지 모를, 진눈깨비만 흩날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에 붙어 눈 구경을 한다. 그만큼 눈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최근 서울에서 함박눈을 맞았다. 고양이 발가락만 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는데, 바람까지 매섭게 부는 날씨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와, 눈... 폭풍이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울 사람이 '? 보통 눈보라라고 말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눈폭풍과 눈보라, 둘 중 뭐가 맞는 말이지?


눈보라는 바람에 휘몰아쳐 날리는 '눈'을 말하고, 눈폭풍은 눈과 섞이어 매우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말한다. 눈과 바람 둘 다 강렬한 날씨였으니 결과적으로는 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가 눈보라라는 단어를 내뱉기 전까지는 마치 이 세상에 이런 날씨를 표현하는 말이 없는 듯이 느껴졌고, 당장 떠오르는 두 단어 '눈'과 '바람'의 합성어를 만든 것이었다.


눈보라라는 세 글자는 마치 중학생 때 쪽지시험을 위해 외웠다가 잊어버린 단어 같다. 언젠가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접했으나 실제로 경험한 적 없어서, 무의식에 있어도 기억에서는 사라진 단어 말이다. 평소 쓰지 않던 말이니 내게는 없는 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국어도 아닌데 읽고 듣고 쓰지 않는다 해서 한글이 잊히다니 애석한 일이다. 어째서 언어란 이토록 쉬이 상하는 것일까?


바닷바람에 익숙한 나는 평생 바람, 강풍, 태풍, 폭풍 같은 단어들을 즐겨 써 왔다. 이는 특별한 노력 없이 그냥 생활하다 보니 익숙해진 말들이다. 그러나 실바람, 산들바람, 하늬바람 같은 단어들은 또 낯설어 잘 쓰지 않는다.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는 데는 몇 분씩 걸리거나, 어학사전 검색을 통해서만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아는 바람은 겨우 네다섯 종류 밖에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세상도 이것보단 넓을 거 같은데.


또 그 기점이 왔다. 머리로는 알았으나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몸소 깨닫는 때가. 늘 익숙하고 편안한 단어만 사용하면 내 세상도 그 안에 갇혀 버린다. 눈보라를 보고도 눈폭풍(원래 있는 말이지만 어쨌든 말하는 당시에는 단순히 단어를 조합했으니까)이라는 단어만 떠올릴 수 있는 삶을 계속 살고 싶지는 않다. 내리는 눈을 보며 함박눈, 가루눈, 포슬눈, 풋눈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글도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21세기에 살면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모국어인 한국어까지 못하면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다섯여섯 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한글을 못 뗐다니.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참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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