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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모과

by 이애리
그러니까 어느 날
무언가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_오후 네 시, 최현우

연두색 아래로 노란빛이 감돈다.

추석 연휴 동안 안동에 들렀다. 어둑해진 낙동강 줄기를 바라보는 병산 서원에 들어서는 길에는 모과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다. 노란 모과가 하늘에 바짝 튼실하게 달려있다. 나무 밑동 아래에는 썩은 모과가 이끼에 포옥 싸여 있다. 덜 썩은 모과를 집어 코에 대었지만 향이 나지 않았다.

문득 우리 아파트에 단 한 알 달린 모과가 생각이 났다. 4월 분홍빛 모과꽃이 피면 그렇게 설레었다. 아파트에서 전지 작업을 한 후 남은 모과는 하필 몇 개 달리지도 않은 가지에서 가장 연약한 단 한 알이었다. 산책길에는 부러 돌아가 아직, 달려있나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동안 걷을 시간이 없어서 계속 내리는 비에 아직 달려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안동에서 올라온 지 2주가 지났다. 문득문득 모과 생각이 났지만 그쪽으로 커피를 마시러 갈 시간이 없다. 걷지 않았다. 걸으면 아침에 일할 시간이 없다. 걸으면 아침에 약속을 잡을 수가 없다. 걸으면 아침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걸으면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오늘만, 오늘만 걷기를 쉬자 스스로를 달래었다. 2주가 지나도록 내 시간 감각은 아직 비가 많이 내리는 구월이다.

타이레놀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연륜을 장착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이를 먹으면 적당한 거리와 무심함이 생기는 것인 줄 알았다. 하루에 여러 가지 일을 해도 나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독단적이라고 말한다. 이상하다고 한다. 욕심이 많단다.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인상이 변했다고 한다.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고민이라고 말한다. 나를 조각내는 숱한 글과 말을 무심상하게 흘려보내야 한다.

꽃집에서 얻은 코스모스 한 송이를 사진으로 남겨 막내 고모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어릴 때 고모는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노래방 기기가 콤비인 비싼 전축에 연결된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꼬옥 쥐고 고모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던 노랫말이 생각난다. 왠지 막내딸 강아지 송이를 힘껏 끌어안은 고모의 웃음소리도 홍홍홍 퍼져오는 듯해 기분이 나아진다.

며칠 뒤 고모는 추석에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며 말을 건넨다. 명절이 돌아오면, 어른들도 부모가 그렇게 보고 싶은가 보다. 나는 그렇게 할머니한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는데, 할머니는 매번 나라더니, 마지막 물음에는 한 다리 건넌 너보다는 아빠가 제일 좋다는 말을 했다. 나한테는 맨날 할머니가 처음인데, 진짜 마음을 모르겠는 어른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사랑은 대를 거듭할수록 옅어지는 것일까. 이번 추석에 할머니를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죽은 이와 살은 이에게서 아이들을 챙겨서 도망치느라 버벅거렸다.

옷가게를 하지만 옷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고모는 진열한 옷 아래 노오랗게 물든 울퉁불퉁한 모과 네 알이 놓인 사진 한 장만 보내고는 더 이상 말이 없다. 나는 큰고모를 쓰다가, 할머니를 쓰다가, 안강을 쓰다가 지우고는 메시지 창을 닫았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잡이 봉에 올려진 작은 모과를 발견했다. 만질까 말까 누굴까 이건 진짜 모과일까 생각만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희부윰한 달빛이 길을 내는 빈 놀이터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집이 아닌 데로 둘러 걷는다. 흔들어대는 자작나무 이파리 소리를 들으며, 유난히 빨간 산사나무 열매를 밟다가, 땅에 바짝 붙어 겹겹으로 피어나는 주황빛 메리골드에 머무르다가.

어차피 떨어질 모과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외등 아래에 선다. 땅만 바라보다 모과나무에 다다른 나는 푸른 채로 툭 떨어져 까맣게 썩은 모과를 떠올리다, 기억이 불거져 몸에 옹이를 남기고 시월이 된 단 한 알의 모과를 바짝 올려다본다.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채로 연두색인 열매는 깊은 어둠 속에서 노랗게 물든다. 시월 한 알의 모과는 내 염려와 달리 더욱 튼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막내 고모는 고모만의 모과 기억이 있겠지, 지난겨울 눈 위로 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하얀 눈 속에 파묻혔던 모과들은 이제 단 한 알의 모과가 되어 매일 다른 삶을 구현한다. 내가 실망하거나 자랑해도, 마음을 졸이거나 환희에 차더라도, 모과는 무심하다. 모과 한 알로, 다섯 알로, 옹이로, 벌레 먹은 잎사귀로 산다. 계절은 사라지는데, 모과는 모과였다.

잊은 모과의 단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온다. 꾹 다문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기러기떼가 꾸르럭 소리를 내지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가르고 브이 대열로 날아간다. 초록 트랙 위에 선 나는 기러기떼가 날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붉어진 산수유나무를 지나, 시골집 처마에 달린 전구같이 노란빛을 밝히는 뾰족한 대봉 감나무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어서 유능할 것이다

_오후 네 시, 최현우

아침이 되며 서두른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초록 트랙 위에 선다. 여기서 저기로 지나가는 바람결에 나는 살아서 노랗고 빨간 것들을 감각하고 싶다. 수직 낙하하는 생과 사방으로 생동하는 죽음이 교차하는 겨울은 반드시 찾아와 내 그림자를 조각내더라도, 끊임없이 되찾아서는 돌아와야지.

헤드셋을 끼고 노란 햇살을 받으며 뛰는 한 사람이 내 옆을 스쳐간다.

그래서 우리는 나아간다.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끝없이 과거 속으로 물러서면서,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나는 되새김질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백팩을 내려놓는다.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뛰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 나도 불켜진 어둠 속으로 리드미컬하게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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