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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미아 되다

by 이애리

자네, 어쩐 일인가.

남편이 추석 연휴가 지나고 장모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를 받은 친정 엄마의 첫마디였다. 그래도 엄마는 사위라고 전화는 받았는가 보다 헤아린다. 남편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 것은, 제 때 남편에게 지시하지 못한 나의 부덕이다.

이번 추석은 대체 공휴일과 재량 휴업일이 끼여서 가을 방학이나 다름없다. 시댁 차례는 형님과 부모님이 지내고, 친정은 몇 년 전 제사와 차례를 없애면서 부모님은 여수로, 오빠네는 일본으로 여행을 간다. 나도 돌숲 문을 닫고 무작정 경상도로 여행길에 오른다. 첫날은 매해 추석 기간에 탈춤 페스티벌이 열리는 안동으로 향한다. 안동은 여행객이 몰린다고 해도 지역 관광지라 북촌처럼 서양인 반, 동양인 반으로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급작스런 여행을 떠나는 편이지만, 늘 가던 곳에 가고, 항상 묵는 곳에 숙소를 잡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같은 곳에 계속 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신경 쓸 필요 없이 편안히 누리며 온다. 별다른 일이 없는 대신, 특별한 일도 없다.

오랜만에 온 안동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탈춤 공원에 가서 행사장에 마련된 부스에서 굿즈를 사고 체험 활동을 하며 돈을 쓴다. 둘째는 더피 탈을 만든단다. 집에 탈이란 탈이 계속 굴러 다녀서 다 버렸지만 만들라고 하고 옆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나 하염없이 본다. 겨울에는 눈을 원 없이 보더니, 올여름부터는 비를 원 없이 본다.

추석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나는 아직 낯설다. 가족의 개념도 새삼스럽게 어느 범주까지 일까 생각한다. 암튼 우리 가족은 비어있던 고택에도 명절이면 불이 켜지는 안동으로 왔다. 집집마다 오래된 가마솥이 끓어오르고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해외로 가면 나았으려나. 비가 오는데 국내에서도 경상도, 유구한 전통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안동으로 내려오니 뭔가 쓸쓸하고 시틋하여 세계가 오늘 밤에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나는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권을 가져왔다.


기억하는 건, 그 가을의 비 내리는 저녁에 아무도 나를 꼭 안아 주지 않았다는 것뿐. 그건 마치-내게는 세계의 끝 같은 것이었어요. 어둡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견딜 수 없어서 누군가가 꼭 안아 줬으면 할 때, 주위에 아무도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당신은 알겠어요.

_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377쪽


긴 연휴가 주체가 안 된다.

아이들이 컸는지 예전에는 끌고(?) 다니며 보았던 탈춤을 추억 삼아 다시 보고 싶단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므로 나는 지겨운 마음도, 반가운 마음도 없이 같이 본다. 그나마 대만 탈춤을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인도와 미국, 일본, 중국이 한 번에 나오는 탈춤을 보는데 남편이 학교 동아리 수준이라고 말한다. 나도 억지로 즐겁게 보고 있지만 같은 생각이었는데, 이런 생각과 대화를 몇 년 전에도 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두 딸과 우리의 대화가 달라진 것이다. 아주 어렸던 둘째는 이런 공연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어지럽다고 울었고, 소리에 압도된 일본 난타 공연과 남녀 커플이 춤을 추며 계속 뱅글뱅글 도는 미국 공연단의 충격적인 공연에 매료된 큰 아이는 계속 볼 거라며 졸랐다.

이제는 보고 들은 것에 어느 정도 비평을 할 줄 알게 된 두 아이는 가장 인상적인 공연으로 인도 탈춤을 꼽았다. 왼손을 쳐들고 오른발 왼발 좌우로 왔다 갔다 춤을 추는 무념무상의 인도인이 추는 춤은 가히 한국에 사는 인도인이 급조로 불려 와 춘 게 아닐까, 저 표정은 어쩌면 가장 인도스러운 것일지도 몰라, 정말 하기 싫은데 끌려온 듯한 저 표정은 어떡하지, 단순한 공연을 보는데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그 공연이다. 아이들과 남편은 나도 인도 탈춤 출 수 있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게 인도 탈춤의 함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탈춤의 정수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러 하회마을로 이동했다. 벼가 누렇게 익은 사방은 몇 년이 지나도 장관이다. 예전에는 목련을 심었는데, 올해는 곳곳에 아스카를 심어 누렇고 보라색이 일렁이는 벌판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비가 계속 내려 진흙길에는 전동차와 자전거가 계속 다닌다. 그들을 피해 낙동강 모래톱으로 걸어가 만송정에 다다른다.

탈춤 전수관에서 만송정으로 공연 장소가 갑자기 변경이 되는 바람에, 이동 중이던 우리는 일찌감치 부용대 절벽을 배경으로 한 무대를 정중앙에 두고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직관할 수 있었다. 이 의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남편이 모래톱에 처박힌 의자 네 개를 구해와 앞에 아이 둘, 바로 뒤에 우리 부부가 한 시간 동안 고개도 뺄 필요 없이 정면에서 공연을 볼 수 있게 한 배려의 의자였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관람객이 몰리면서 우후죽순 앉기 시작했는데, 추석 연휴에 동서양 대가족이 많이 몰렸다. 하필 내 자리가 급조된 통로 옆이라 누구든 내 옆으로 엉덩이를 들이미는 곳이었는데, 의자에 붙어있는 내 엉덩이가 민망해 자꾸 들썩였다. 내 옆에 앉은 남편은 공들여 온 의자를 자꾸 내주려는 내게 화가 났던지라 팸플릿만 쳐다보라더니, 급기야 정당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자신을 나쁜 사람 만든다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오냐, 무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의자 한 개를 내 옆에 놓고는 우리 엄마뻘인 딸이 친정엄마를 내 옆에 앉히며 멀리 서서 엄마를 지켜본다. 우리 쪽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딸 보고 나 대신 앉으라고 하고 싶은데 째려보는 남편까지, 시선의 중간에 끼어 좌불안석이다. 못돼 처먹은 양반, 니 부모라고 생각해 봐, 지금 어머님이 아무도 자리 양보 안 해주면 어떻겠니라고 말하는 순간 남편의 동공은 흔들리는 것 같더니, 우리 엄마는 이런 데 안 와로 일갈한다. 평소에 바른말만 하는 저 주둥아리를 틀고 싶었는데, 오늘은 우기기까지 하니 얄밉다.

다른 때 같으면 조용히 일어섰을 테지만, 이번에는 왠지 남편의 행동에 동참해야 할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무대만 바라본다. 이내 무등을 탄 각시탈이 양손을 흔들며 나온다.

드디어 안동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주지마당을 거쳐 백정마당에서 백정이 관중을 향해 성적인 농담을 건네며 이 불알 누가 살 거냐고 하는데 어디 하나 나서는 이 없다. 어느 해에는 놀 줄 아는 할아버지가 불알을 사겠다고 나서며 돈 걷는 바가지가 돌았는데, 오늘은 모두 손사래를 친다. 옛다, 내가 사겠소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는데, 가라앉은 마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참, 용기 없는 양반들일세.

옆에 앉은 할머니가 백정이 하는 말이 재밌는지 아이처럼 웃으신다. 팔걸이에 사뿐히 올려둔 손목에는 오래된 작고 동근 시계가 째깍째깍이고, 고목 같이 푸른 핏줄이 선 손은 연신 까딱 까딱 이신다. 할머니는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오가는 사람을 붙잡아 할머니 앞에 들어오게 하더니, 내 팸플릿을 얻어서는 그이보고 깔고 앉으라고 하신다. 나도 모르게 그만, 기억 속 할머니가 오늘은 정말, 할머니 모습 그대로 오셨나 생각이 들며 울컥한다.

친오빠네는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 부모님은 여수로 여행을 가셨다. 지금 이 시간이면 시어머님은 차례상에 올릴 음식의 재료들을 다듬고 계실 것이다.

너무 멀리 왔을까,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먼 사실에 아득해졌다가. 사실은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탈춤이 취소된다고 해서 비가 내리지 않기를 아슬아슬 마음을 졸이며 할머니가 배시시 웃으면 나도 할머니 따라 함박 웃는다.


이번 여행은 죄 비라며,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캄캄한 빗길을 뚫으며 운전하던 남편이 말한다. 원래는 영월에서 하루 더 묵기로 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영월에 도착했는데, 숙소를 알아보던 남편은 그냥 돌아가잖다. 더 묻지 않고 나도 그러자, 집으로 향한다. 조수석에 앉아 캄캄한 어둠을 전방 주시하며 마지막 남은 땅콩 카라멜을 천천히 녹여 먹던 나는 갑자기 사례가 들렸다. 엄마를 내내 생각만 하다가 우리는 추석 연휴 내내 전화 한 통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엄마는 어디 즈음 있을까? 남편은 수원에 도착하자마자 겁에 질려 장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산소에 들러서 이모를 만나고 왔다는 엄마의 첫마디는 그랬다.

자네, 어쩐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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