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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형석이야

by 이애리

나 형석이야.


어쩌면 내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년도 더 된 일이다. 교회에 다니는 아주버님댁과 그때만 해도 경북 김천에 살면서 친정이 양산이었던 나는 시부모님께 명절에 형님댁과 돌아가면서 차례를 지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획기적인 방안에 나는 들떴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꼬장꼬장하셨던 아버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결국 명절만 되면 우리 부부는 어렸던 아이들과 김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차례를 지내고 경남 양산까지 내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에야 차례와 제사를 없애고 연휴에 여행이나 가란다고 먼저 제안한 친정 엄마도 그때는 어떻게든 있지도 않은 가풍을 전해 주려 며느리와 사위를 내려오게 하고야 마는 기세 있는 어른이었다.

이제 반백세를 바라보는 나는 배째로 일갈하는 딸이자 며느리지만, 2-30대 순했던 나는 양가 어른들 사이에서 눈치 보며 명절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시절이 있었다.

안동에서 미아 된 추석 다음 날, 우리 가족은 그제야 시댁으로 향했다. 시댁은 삼 남매인데, 결혼 후 여섯 명이 된 삼 남매 내외와 시부모님 두 분은 매 순간 의견 합일을 이루기 힘들어 각자 따로 부모님을 보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몇 년은 우리가 차례를 지냈고, 아주버님이 차례를 지낸 지 2년 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뜻하지 않게 제사도 돌아가며 지내니 이게 다 내가 10년 동안 쌓은 공덕이 아닐까,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미소를 짓는다. 남편이 그런 내게 서운해해도 남편의 어깨를 서슴없이 치며, 세상 일이 참 묘하게 돌아간다고 말면 될 일이다.

암튼, 아버님과 사이가 소원해진 남편의 누나네도 한동안 시댁을 찾지 않았다. 어머님은 딸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견디는 듯했다. 당시에 나는 딸네와 싸운 아버님을 탓하면서도, 아버님에 감정 이입해서 자식들을 가장 괘씸하게 여긴 순간이기도 하다. 사춘기의 두 아이를 키우는 나는 이제 곧잘 부모님께 자주 감정 이입을 하곤 한다.

남편은 주방으로 향하고 아이들은 작은 방에 틀어박힌다. 나는 아버님 앞에 오롯이 앉아 대추며 밤이며 아그작대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딸을 안 본 지 4년이 지난 몇 달 전, 갑자기 외손주와 사위(그러니까 남편의 매형)가 찾아왔는데, 안 보는 사이에 그 집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른다, 아버님은 꽤 감격해하시며 그간의 딸의 행보를 구구절절 말씀하신다. 반가워서 그러셨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약 올리려고 그러시나 의구심도 살짝 든다. 여전히 삼 남매가 한 집에 모이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딸이 다시 오기 시작해서 나는 왠지 안심이 되었다. 남편의 누나는 싹싹해서 시부모님께 편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고, 누나도 친정 부모님의 든든한 비호가 그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대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게다가 웬일, 어머님께서 이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어머, 아버님께 되물으니, 진짜란다. 차례가 있든 없든 명절에 내 역할이 큰 건 아니지만, 오래 염원한 일이 이렇게 풀릴 일인가. 오예, 이제 내 세상! 혼자 해죽해죽 쪼갠다.


앗, 방심했다. 왜 그러셨어요, 실실 쪼개다 말고 속엣말이 나온다. 이제 남편의 형네가 오지 않는단다. 순간 나는 막장 며느님을 자처하며 아버님께 어떻게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시면서 자식들 보려고 하느냐, 참으시지 하고 한소리 드린다. 그제야 어머님도 그러게나 말이다 거드신다.

우선 어찌 된 일이냐고 여쭈었다. 추석 전 날, 매번 명절 음식 하려고 치면 늘 늦는 아들 내외가 미웠던 시부모님은 주말 성묘와 벌초 일정을 조율하며 급기야 장남렐라 하시며 꾸짖으셨단다. 갑자기 또?! 나는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놈의 장남 소리에 질린 진짜 장남은 장남인데 어릴 때 비비탄 총을 안 사준 이야기를 꺼내며 나 포함 가족 어느 누구도 장남 대접을 해준 적이 없다고 하셨단다.

처음에는 유치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나도 몇 년 전에 아빠한테 나를 업고 응급실 한 번 간 적이 있느냐고 올케언니 앞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서 앞뒤로 장남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나는 가부장 집안에 막내딸인 데다, 딸 둘 엄마라 장남의 일을 헤아리기가 썩 쉽지 않다.

사랑 많이 받았지만, 너무 받아서 부족해 보이는 우리 장녀, 정이를 떠올린다. 나는 늘 정이가 먼저였지만, 정이는 내가 늘 밤이가 먼저였다고 말한다. 두 아이 중에 오랜 기간 마음이 안 풀리는 그 아이가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첫째는 내가 가장 미숙하게 키웠음에도 내 분신과 같아서 늘 애증이 따른다. 첫째가 늘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첫째는 내가 전혀 모르는 첫째 나름의 사정이 있다.

장남이지만 장남 대접은 못 받은 아주버님은 아직 응어리가 남아서 옛날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나조차도 예전에는 오빠 오빠 부르던 애리가 어느 날, 아주버님의 잣대를 들이댔을 때 형은 슬펐던 것이 아닐까.

다소곳이 설거지를 하며 옆에 듣고 있던 차남은 왜 맨날 장남만 해줬냐고 울분을 쏟는다. 그러다 차남은 갑자기 장남 편을 들며 화살을 아버님께 돌린다. 또 누나 자랑 했냐고 묻는다. 나를 앉혀놓고 딸 자랑을 한 바가지 쏟아내시던 아버님은 입맛을 다신다.

차남에게 잔소리를 푸짐하게 들은 아버님은 쟤는, 쟤는 손사래를 치며 별말씀이 없으시다. 나이 80이 되었지만 입안에 혀처럼 구는 자식 하나 없는 게 억울하시겠지 싶다. 당뇨 합병증인 황반 변성으로 늙을 대로 늙어 보이지도 않는 80년 된 눈으로 나를 좇다가, 어머님 뒷모습을 좇다가 누가 누군지를 분간을 못하신다.

윗사람이 공공의 적이 되어야 집안이 편하다. 윗사람이 좋은 사람 할라 치면, 아사리판이 된다. 너도 보통이 아니라는 둘째 며느님(고로, 나)은 가만히 듣기만 한다. 이게 누구 잘못일까 예전처럼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 평생 따지다가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시할머니도 시외할머니도 병이 들자, 떠나셨다. 누구 잘못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한 집안의 혁명가는 분란을 일으켜 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화목한 가족을 만들지는 못했다. 나라의 문화와 기조가 바뀌면 가족의 습이 자연스레 바뀐다. 시대를 잘 타고난 나는 여인들이 차린 제사상 앞에서 몰래 절을 하다가 이제는 제사상조차 차리지 않는 날을 맞이했다. 소수의 희생으로 제사를 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번 분란은 의미가 있었던 것이고. 다이소에 미니 제사상이 그렇게 불티나게 팔린단다. 앞으로 나는 교회든 절이든 집이든, 남편과 나의 조상님을 진심으로 추모하면 된다.

아버님은 제사를 없애는 대신에 당장 이번 주에 성묘를 가잖다. 그래, 차례도 없앴는데 뭔들 못하리오. 남편에게 100번도 가라고 했다. 40년 제사상 차린 어머님도 성묘 준비는 손수 하시겠단다.

어찌 되었든, 이 사달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언젠가 아주버님을 만나면 지난날은 다 묻고 절을 하고 싶다. 20대에는 오빠라고 불렀던 순수한 애리와 교회를 다니는 아내의 죄책감을 덜어주려 이 전쟁을 끝냈다고 믿으련다. 아주버님이 다시 오는 일은 부모님과의 관계다. 서로를 위해 너무 늦지 않게 화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막상 어머님은 후련하면서도 서운하신가 보다. 제사를 없애서 다 좋은데, 막상 자식들이 명절에도 안 온다고 하더라 하신다. 이제 명절뿐만이 아니고 수시로 더 자주 오겠지요 어머님, 걱정 마세요,라고 보통 아닌 며느님답게 말씀드린다.


글쎄, 예전의 나라면 부모님 편에서 남편의 누나나 형을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매형이나 형수를 함께 싸잡아서 말이다.

예전에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가 자꾸 엄마와 이모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이모한테는 엄마 욕을 하고, 엄마한테는 이모한테 섭섭한 이야기를 해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오해하며 자주 싸웠는데, 자매가 나이가 드니 더 나이 든 엄마가 그냥 하는 이야기구나 하고 잘 들어드리고는 늙은 자매 간에도 웃으며 넘어가게 되었단다.

우리 딸들도 그렇다. 둘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길래 나는 종종 중간 개입을 하곤 했는데, 결론도 안 날뿐더러, 중재해 준 공은 없고 나만 심각한 채, 둘은 원래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상 복귀했다. 나의 체력만 고갈되었다. 가족 간에 치고받고 싸우는 일은 숨 쉬는 것과 같다. 그저 오은영 선생님 말씀처럼 그랬구나, 저랬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이제 형이 가고 누나가 온다. 아니, 누나가 오고 형이 갔다.

우리는 베란다에 놓인 닭장 안에서 알을 낳으려고 흙이 없는데도 땅 파는 시늉을 하는 암탉을 본다. 알 하나를 낳기 위해 저녁 내내 온몸을 비튼다. tv도 켜지 않고 다 같이 가만히 지켜만 보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어 궁금한 우리 집 장녀와 차녀도 게임을 하다 말고 나와 부모님 발치에 앉아 암탉을 함께 본다. 엄마, 닭이 먼저 게, 알이 먼저 게 묻는다. 문득 우리 집 새 호두가 알을 낳던 기억과 내 분만실 장면과 어머님의 세 남매 출산 이야기가 암탉의 산란 때와 겹쳐진다.

결국 우리가 못 본 사이에 닭은 알 하나를 낳았다.


7시 30분이 얼마나 남았냐고 몇 번 물으시던 아버님은 그 시간이 되자마자 몬트리올에 이민 간 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전화를 걸어달란다. 우리 모두 아버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던 아버님 친구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스피커폰을 켜고 아버님 곁으로 조용히 모여들었다.

심장과 눈 수술을 하고 이제 귀 수술을 앞둔 아버님 친구는 자다가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몬트리올이 아닌가 보다. 그곳은 지금 새벽 세 시란다. 계속 누구여, 묻는 친구에게 아버님은 핸드폰에 대고 수줍게 외친다.

나, 형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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