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한 사람을 만난다. 짙은 푸른색 커튼이 걷히며 캄캄한 무대로 그가 나타났다. 케스포 돔에 가득찬 수많은 팬들의 환호를 뚫고, 짙은 저음의 김동률 목소리가 빛처럼 공명한다. 오페라의 서곡 같은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단단한 그의 목소리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내게 ‘옛 얘기지만’을 고백한다.
날 사랑했던 기억이 때로는 힘이 되는지 오히려 후회되는지 생각도 않는지 날 원망하던 기억도 쉽사리 잊혀진 건지 꼭 그만큼만 남겨뒀는지 함께 불렀던 그 노래에 한 번쯤 나를 생각할지 무심코 그냥 흥얼거릴지 날 사랑했던 기억이 때로는 힘이 되는지 오히려 후회되는지 생각도 않는지
망각, 김동률
나는 가끔 내 불안이 18살 고등학생에 멈춰있다는 생각을 한다. 18살 그때 je를 독서실에서 처음 만났는데 삶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내가 얼마나 비루해질 수 있는지, 인생이 막장이라는 것을, 그 아이라면 왠지 알아줄 것만 같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 후에 우리는 같은 교실에서 재회하였고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19살 고3이 되었을 때 우리는 곧잘 서로의 집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je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라며 내게 김동률의 연두색 앨범 2집을 들려 주었다. 엄마가 없는 je 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이 할머니집에 얹혀 살던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분신이었고 구원이었다. 함께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들으며 억눌러 있던 상실감과 패배감을 달래었다. je와 함께 있을 때면 내 앞에 펼쳐질 생은 단연 선명하고 열정적인 것이었다.
10대의 생기가 사라지고 생이 그저 무료하고 막연해서 미칠 것만 같던 내게 좋은 대학에 가서 잘 살고 싶다는 야망이 있는 je의 모습이 참 예뻐보였다. 목표를 향한 전투적인 모습이 부럽기도 했으며 때때로 괴리감이 들었다.
혼자가 되면, 패배감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 온통 허우적 대느라 매일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교실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옆에 앉은 친구가 계속 사각사각 끄적이는 소리가 미워서 엎드려서는 김동률의 2집 앨범을 계속 들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je는 악착같이 생활한 끝에 대학에 당당히 입학했다. 나는 여전히 생의 그늘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사촌이 소개해 준 부산에 있는 한 백화점에 취직을 했다. 밝고 눈부신 조명 아래 유니폼을 입고 화려한 골프 웨어 직원으로 일을 했지만 그 시절 남은 기억은 온통 밤이었다. je와 친구들이 백화점에 번갈아 오며 결국 나도 대학에 가기 위해 반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할머니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엄마와 번갈아 할머니를 돌보기로 하며 재수 학원 수강료를 벌기 위해 무리해서 일을 더 하기로 했다.
양산역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첫 지하철을 타고 졸면서 출근을 한다. 아침에는 사람 하나 지나다닐 수 있는 좁고 긴 창고에서 일명 까대기를 하고 물품을 정리한다. 점심시간에 쪽잠을 자고 일어나 매장에 서서 내내 손님을 맞이하다 9시가 넘어 어둠 속으로 퇴근한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놀고 싶어 집으로 가지 않고 할머니 병원으로 간다고 거짓말로 엄마한테 허락을 구한다. 친구와 늦게까지 놀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하고는 했다.
병원에 마지막으로 묵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할머니가 백도가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나는 비싼 백도 대신에 저렴하고 딱딱한 복숭아 몇 알이 든 봉지를 들고서 졸음과 술에 취해 병원에 느지막이 갔다.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맨질맨질한 흑빛의 할머니 얼굴을 두손으로 매만지며 재롱부리다 뼈만 남은 할머니를 끌어 안고 잠이 들었다. 병실의 온갖 소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나는 나를 내려다 보며 희미하게 웃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 밖을 나선다.
우리는 근처 목욕탕에 가서 할머니가 어릴 때 나를 때수건으로 밀어 줬듯이, 나도 할머니 몸을 박박 씻겨 드린다. 그때 할머니가 너는 내 자식이나 다름 없으니 내가 죽거든 상복을 입으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할머니와 점심으로 칼국수를 사먹고 병실에 돌아와 나는 또 할머니 곁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할머니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매번 병실 침대 위에서 잠만 자다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는데, 그날은 할머니가 내 양손에 딱딱해서 못 먹겠다는 복숭아 봉지와 용돈을 쥐어 주셨다. 나는 겸연쩍게 받아 들고는, 다음에 꼭 백도를 사오겠다고 뭉개듯 말하고는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을 것이다.
할머니의 병원은 딱딱한 복숭아와 물렁물렁한 백도의 차이를 모른 체 할 만큼 철이 없던 내가 현실에서 잠시나마 숨통을 트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가 죽는 날을 받아놓고 병원에서 지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나는 상장처럼 상복을 입었다. 철이 없었다. 할머니에 대한 부채감과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다렸다는 듯이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부산에서 서울 노량진에 올라와 고시원과 셰어하우스와 월셋방을 전전하며 계속 공부를 했다.
수능 직전에 김동률이 3집 앨범 ‘귀향’을 발매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패배감도, 두려움도 없어졌던 나는 시간이 부족해 그의 앨범을 아껴 듣다가 문득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에 울음을 삼켰다. 한동안 할머니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는 꿈을 자주 꾸었다.
시험을 치고도 바로 동대문 시장과 음식점이나 사무실 등 밤낮으로 일을 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쌍꺼풀 수술을 하고 잘 차려입은 je가 몰라볼 만큼 생기 가득한 모습으로 나를 보러 동대문 시장에 왔다. 그동안 친구도 아빠가 돌아가시고 친구와 둘이 살고 있는데 만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je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마음으로 야밤에 나를 보러 왔는지 헤아릴 새가 없이, 그저 나를 보러 왔다고 해도, 나는 매장 안에 옷이 담긴 대봉들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왠지 연민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듯이 행복하기만 한 je가 꼴보기가 싫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다투었고, 친구는 새벽에 먼길을 돌아갔다.
입학과 졸업을 하고 원하는 일을 하며 결혼을 한 우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 30대가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그리웠던 간절한 마음은 10대의 불온하고 애틋했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 주지는 못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김동률도, 속삭임도, 눈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륜으로도 그간의 간극을 좁힐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배려가 부족하고 철없던 20대의 나를 오랜동안 질책하며 여태 붙잡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밴드, 코러스의 아날로그적 협연 위로 세 개의 대형 스크린 속에서 모래 바람이 휘몰아 치고 소용돌이 친다. 그의 목소리가 불러오는 ‘망각’은 끊임없이 기억을 몰고 와, 파도가 모래 위에 새겨진 이름을 몇 번이나 쓸어 가듯, 내 유년과 청년 시절을 헤집어 흐트린다. 망각 속에 잠든 시절이 깨어나 다 지워져 버린 그곳에 진정, 무엇을 채울 수 있을까.
고상지의 아코디언 연주가 격정적으로 치닫고, 김동률의 목소리가 얹히고 마음 안에 가득 찼던 물이, 모래가 뒤섞이며 빠져 나간다. 애써 잡지 않으며 흘려 보낸다. 흩어진 기억을 되돌리지 않는다.
같이 걷자고 했잖아. 이토록 좋은데.
산책을 부르다 그는 어떤 감정을 삼키는 듯 커튼 너머로 터벅터벅 빠르게 걸어 간다. 새벽에 쌓인 하얀 눈 위에 왼발, 오른발 내딛 듯, 스트링 사운드가 베이스가 브라스가 코러스가 차례 차례로 그의 텅빈 자리에 흔적을 남긴다. 짙은 푸른색 커튼이 내려오며 1부가 끝났음을 알린다.
음악 안에서 나는 부재한 그들을 모래로, 빛으로 혹은 환상이라 할지라도 존재의 사물로 다시 조우했다. 곁에 없는 그들을 마음껏 만끽한 나는 이제 지난 시간을 그만, 보내고 싶어졌다.
인터미션에 커튼콜이 시작되며 고상지 콰르텟이 선다. 영광의 자리라고 말하는 고상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은 단지 네 악기로 ‘졸업’을 연주하며 정말 1부가 끝났음을 들려주었다.
이어 김동률이 작사, 작곡하고 김원준이 부른 ‘쇼’를 편곡하여 들려준다. 내가 아는 노래에 새롭게 편곡된 음악이 포개어지고 ‘쇼’는 더욱 풍성해진다. 한 시절의 작품은 연주자와 상황, 공간에 따라 다양한 악기와 편곡으로 재해석된다. 그때마다 변화한 나 또한 새로운 감각으로 음악을 다채롭게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쇼! 끝은 없는 거야.
2부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커튼콜로 ‘시작’, ‘동화’가 이어지고 ‘모험’까지 한 시퀀스로 연극 무대처럼 꾸몄다. 내가 동화 속 숲속에 있는 듯 요정들이 춤을 추고,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무대 장치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이어진 ‘황금 가면’에서 김동률 조차도 인간이라면 할 수밖에 없는 안무를 보태며 열창했다. 황금가면 모양의 금가루가 날리며 그는 찬란하게 퇴장한다.
섬세하게 공들인 그의 입장과 퇴장에서 조차 그저 노래 한 막이 시작되고 끝나는 커튼콜이 아니라, 상징과 함의로 촘촘하게 설계된 스토리가 읽혔다.
잃은 것이 많아요. 제가 이제 해외진출을 바라겠어요. 차트 1위를 바라겠어요.
여기까지 해오다 보니, 남은 건 (음악을)함께 하는 여러분과 (여전히 제 음악을 듣는)여러분들입니다.
그가 담백한 ‘취중진담’을 마치자 사방으로 앉은 남자들이 짐승 같은 목소리로 포효하며 화답했다. ‘답장’을 끝으로 다시 나타난 그는 앙코르로 ‘첫사랑’을 끌어 오고, 끝내 ‘기억의 습작’을 우리와 함께 부르며, 콘서트를 마쳤다.
맹맹해진 코를 훌쩍이며 ‘옆사람’을 먹먹하게 쳐다 본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이미 눈물을 죽죽 쏟아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코인 노래방에서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와 ‘취중진담’을 열창하는 ‘내 사람’ 이다.
내 사람
나를 쓸모있게 만들고
나를 다 몰라줄 때
내 옆에 있다는 날 어지럽게 만들고
더 착해지게 만드는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웃고 싶은 더 안고 싶은
넌 내 사람.
우리는 콘서트 내내 손을 잡거나 서로의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기대지 않았다. 한때 열망의 시간을 지나온 우리는 이제야 나를 제대로 맞이한 순간이었다. 남편의 가지런한 두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눈물을 닦거나 박수를 치다가 노래가 끝나는 순간에는 입가에 대고 환호를 한다.
나는 홀로 팔짱을 끼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면, 맞짱 뜨러 오거나 두고 보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정작 나는 음악으로 가득 찬 천상의 공간에서 기억과 망각을 오가며 지금의 나를 마음껏 향유했다. 브라스와 피아노, 지휘자, 목소리 등 여러 악기가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되었듯이, 나 역시 10대의 너와 나, 20대의 당신과 나, 30대의 그대와 나를 만나 오롯이 내가 된다. 그들의 소리가 공명되어 나는 하나의 음이 되고 가득 찬 객석은 음악으로 물결친다.
내 기억의 잔상이 마음에 흉터처럼 남아 차마 보낼 수 없었던 수많은 그들이 음악의 물결을 따라 파도치며 밀려왔다 흘러간다. 뒤를 돌아본다. 망각의 저주에서 풀린 기억은 유영하며 내게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득 차고 비워진 나의 세계는 빛으로 다시 가득 스며든다.
돔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데 밤바람이 포근하게 우리를 감싼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각자 한걸음 내딛는다. 은행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 속에서 빛조각 같은 은행 나뭇잎이 밤하늘에 사무치게 흔들린다. 노란빛 환상은 오래된 나무를 온통 뒤덮고 가을을 빛내 주다 이제 우듬지가 텅빈 채로 뼈 같은 가지를 드러내고 우리를 굽어본다.
다시 겨울이 왔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은 먼저 걸어 나가는 남편의 팔을 붙들어 팔짱을 낀다.
‘같이 걷자 했잖아.’
2025년 The concert 를 산책하며 땅에 떨어진 노오란 은행나무 이파리가 밝혀주는 빛길을 따라 우리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