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가 없었더라면.
하트를 보았다.
얼마 전 사진첩 정리를 하다가 엄마, 아빠와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보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변경했다. 부모님과 조카네와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가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그렇게 지난 일에는 회한이 어린다.
얼마 뒤, 그 사진에 하트 하나가 눌러져 있었다.
왜 포드 고모인지 모르겠다. 둘째 고모도 아니고 딸 이름도 아니다. 생각해 보니, 고모의 첫째 딸 이름이 희경이 인데, 첫 고모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니를 포드라고 불렀고 여전히 언니는 포드로 불린다. 자연스레 고모는 포드 고모가 되었다.
포드 고모는 사람을 많이 사랑한다. 지금도 조카인 내게 먼저 전화를 걸고, 끊을 때는 늘 최서방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말한다. 최서방과 통화를 하고 싶은 거다. 고모의 관심과 사랑에 진절머리를 치다가 불현듯 고모처럼은 안 돼야지 하면서, 나는 고모를 닮아간다.
나는 첫째 고모의 호방함과 포드 고모의 연민과 셋째 고모의 문학성과 막내 고모의 실리적인 면을 닮았다. 사람을 무척 사랑한 그녀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어느 날 내게서 문득 그녀들을 한 번씩 발견하거나 떠올리고는 한다.
첫째 고모는 죽었다. 셋째 고모도 죽었다. 둘째 고모도 죽을 것이다. 막내 고모도, 나도 죽는다. 남은 고모들과 나는 이제 죽음 앞에서 서열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감정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막내 고모와 통화하면서 나보다 더 오래 살아라 농담을 건넸다. 고모와 함께 나도 늙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눈매가 아래로 휘어지도록 미소만 지었다.
포드 고모는 몇 년째 병석에 누워있었다. 지금은 다행히 둘째 딸과 살면서 집안 살림을 거들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고모는 다시 술을 마신다고 했다. 재혼한 고모부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술을 끊었는데 고모부가 돌아가시고 병에 차도가 있으니 다시 술이 고프단다. 술을 마시는 게 딱히 나쁜 건 아닌데, 고모는 주사가 있다. 누군가에 전화를 걸어서 몇 시간이고 주사가 이어지며 수신인을 괴롭게 한다. 함부로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술이 깨더라도 고모는 기억력이 좋아서 전화를 안 받았다고 잔소리가 몇 시간이고 이어진다. 고모의 전화는 두둥! 언제나 곤혹스럽고 괴로웠다.
지금 고모는 내게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 가끔 아빠한테 하는 것 같다. 아빠는 좀 당해야 된다. 아빠가 겪어야 할 일을 그동안 내가 버텼으니 말이다. 고모는 아빠를 무척 좋아한다. 머리도 좋아, 얼굴도 잘 생겼어, 네 아빠 같은 사람이 어딨 냐고 10살도 안 된 내게 속삭이고는 했다. 젊은 날 고모의 사랑을 충분히 아끼지 못한 아빠는 지금이라도 고모를 넉넉하게 품어야 한다.
사실, 사랑은 포드 고모처럼 해야 한다. 고모의 사랑은 찐사랑이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게 문제지만. 누가 적재적소에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고모 편이었다. 언제나 고모의 사랑을 응원했다. 첫 고모부와 사별한 후에 가정이 있는 고모부 친구와 사랑에 빠졌는데, 변하지도 않고 오래도록 사랑했다. 결국 두 번째 고모부가 되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고모가 아파서 조강지처 집에서 돌봄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두 번째 고모부와 헤어지려고 할 때가 있었다. 고모는 둘째 딸과 부산에 있는 우리 집에 와서 살았는데 학창 시절 동안 난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고모의 둘째 딸을 데리고 엄마가 미용실을 할 때였다. 아빠 없이 오빠와 엄마, 포드 고모와 사촌 언니와 2층 집에서 다복했다. 식당 일을 마치고 온 고모와 미용실을 끝낸 언니와 마주하며 야식을 먹곤 했다. 전학 후에 적응이 어려웠던 나를 알뜰살뜰 살핀 이도 포드 고모와 언니였다. 행복은 아주 잠시였다. 엄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어 본 미용실을 접었고, 고모와 언니는 돌아갔다.
이내 나도 할머니 집으로 옮겨 왔는데, 그때 고모는 두 번째 고모부와 결실을 맺어 두 분이서 살고 있었다. 그때 고모부와 고모는 사춘기에 접어든 나를 딸처럼 챙겼다. 두 분이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는데, 할머니가 그 앞에서 앉아 계시다 오고는 했다. 손빨래를 하시던 할머니한테 세탁기를 놓아준 이도, 전화가 없던 할머니 집에 전화를 놓아준 이도 두 번째 고모부였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던 할머니와 내게 두 분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였다. 고모는 지방에 어른들을 다 챙기면서 내게 혼수와 관련한 지난한 일을 상의했는데, 당시에 나는 결혼 준비에 지쳐 고모의 전화를 간섭으로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날 전화를 걸면 고모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땐 엄마도 아빠도 다 싫었다. 퇴근하는 길에서 왜 다 나한테 그러느냐고, 내가 왜 챙겨야 하느냐고 고모한테 엄청 따졌다. 그 뒤로 고모는 내게 전화를 자주 하라는 요구나 고모 생각을 당최 안 하느냐고 원망하는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줄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힘들게 살았다. 그래도 행복해하셨다. 나는 감히 그런 사랑도 있구나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친정이 양산이어서, 명절에 양산에 들렀다가 경주로 향하고는 했다. 추석이었나 보다. 바람이 불어 살랑한 해 질 녘, 상아색 볕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두 분을 모시고 옷가게에 들어가 고모부 점퍼를 사드렸다. 우리도 넉넉지 않은 시절이라, 정말 아까워하며 계산을 치렀다. 그래서였을까. 인정머리 없는 애리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옷을 사주었으니 내 인생에 너는 되었다 라고 고모는 그 일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알아 준다. 나도 그때 스스럼없이 통 크게 계산한 남편에게 무척 감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부는 돌아가셨다. 아픈 고모는 병원을 전전했다. 다행히 언니 둘이 형편이 좋아져 고생만 한 고모를 챙길 수 있어 그나마 감사한 일이었다. 병이 낫자, 고모는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가끔 포드 고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아직도 나는 고모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지만 웃으면서 고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반응 없이 흘려버리는 내가 밉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고모도 삼킬 줄 안다. 대신 고모는 좋아하는 아빠에게 전화도 건다. 아빠는 만만치가 않은지 자주 못하나 보다. 내게 아빠의 욕을 한다. 나라고 다를 바 없다. 같이 욕한다. 고모의 사랑은 찐사랑인데, 언제나 짝사랑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혼자 하는 사랑과 다름없다.
그렇게 고모는 내가 올린 가족 사진에 하트를 눌렀다. 고모의 하트를 확인한 순간, 내 눈매는 다시 휘어진다. 누워서 핸드폰을 들고 보다가 아빠를 보고, 유일하게 이 사진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 고모의 모습이 내 기억속에 포개어진다. 아파 죽겠다면서도 속 썩인 아빠가, 사람이, 그렇게도 좋은가 보다.
나는 여전히 고모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임을, 눈매가 휘도록 이해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