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풍경

by 이애리

첫눈은 폭설이었다.

해거름에 가게 창 너머 상아색 불이 켜진 우리 집이 보인다. 고열로 둘째 밤이가 결석하고 집에 혼자 있었다. 책방에서 아이들이 오늘 눈이 온다고 하더니, 정말 늦은 오후부터 무겁고 큰 눈이 조용하게 쌓여 갔다.

어둠이 따스하게 내린 흰 밤 퇴근을 한다. 습설이 쌓여 한걸음 내딛으면 종아리까지 푹푹 들어간다. 눈이 쌓여 더 하얘진 자작나무는 가지가 구부러지며 눈을 땅 위로 털어 낸다. 스스스스슥 소리가 들려온다.

놀이터, 축구장 그리고 또 놀이터를 지나는데 곳곳에 우리 동네 어린이는 다 모였나 보다. 평소에 조용해서 자주 찾는 향나무 화단 앞에 선다. 오늘은 이곳에도 발자국이 겹겹이 뒤섞여, 아이들 환성이 소란스레 번져 온다. 구석구석 아이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렇게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크게 자란다.

106동 한쪽 구석에는 이미 아이들 키만 한 눈사람이 서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데, 왁다그르르 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등 뒤로 들려온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에서 내려오려면 시간이 남았다. 밖으로 나가 흰 목련 나무 아래 서서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눈을 뭉치고 던지며 환호하는 아이들.

언젠가부터 막내는 눈을 싫어한다. 이제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드는 일은 남의 집 이야기다. 얼마 전 밤이는 초경을 시작했다. 내년 즈음이면 하겠지 예상했는데 아이들이 치러야 할 통과의례는 늘 예상보다 빠르게 닥쳐온다. 또래보다 어린 첫째에 마음 졸였던 나는 또래 보다 성숙한 둘째의 점진적인 변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번째인데도 나는 또 당(황)했다. 어쩔 수 없다.


(두 손을 짠 펼치며) 우선! 축하해!


정신 차리자. 바쁘지만 할 건 한다. 생리대를 착용하는 방법을 빠르게 읊는다. 이번 겨울 방학에 키가 커야 한다며 일장연설을 보태고 오늘 검정 바지를 입을 것. 배가 따뜻해야 하니 아침밥은 꼭 먹고 가라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낸다. 나의 잔소리 때문이었을까. 학교에 늦은 아이는 헐레벌떡 등교했다. 현관문이 닫힌 순간, 전실에 놓인 거울 속에 확 늙은 내가 나를 본다.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나는 정신 차린 척만 했다.

둘째라 익숙하게 상황 판단은 했으나, 축하는 짧았고 사무적이고 태도로 아이를 대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 표정은 어땠을까, 아이의 표정이 제대로 안 읽혔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어색한데, 아이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가끔 나는 엄마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책방 3주년 겸,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책방 멤버십 친구들과 성인 독서 모임분들께 소소하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1일부터 24일까지 소소한 간식을 넣어서 매일 책을 읽고 하루씩 간식을 빼먹을 수 있는 어드밴트 캘린더를 마련했다. 평소 쓰레기 집합소라고 경멸하던 다이소 여러 지점을 돌아 책 모양 어드밴트 캘린더 120개를 샀다. 사고 보니, 24칸이 아니라 14칸이다. 뒤늦게 엄두가 안 난 나는 환불할까 생각했지만 여러 군데 반품하는 자체가 더 번거롭다. 결국 며칠에 걸쳐서 칸을 채울 간식까지 거실에 한가득 사다 놓고 지친 나는 이제야 저제야 언젠가 포장을 하리라 미루고 있었다.

보다 못한 우리 집 일개미 2호인 밤이가 젤리 봉지며 초콜릿 통을 까기 시작한다. 아마 궁금도 하고, 먹고도 싶어 오랫동안 참았을 것이다. 봉지 봉지마다 까서 죽 늘어놓는다. 열네 가지 종류를 죽 늘어뜨리고 1일부터 14일까지 넣기 시작한다. 그러자 설거지를 마친 일개미 1호 남편이 2호 옆에 앉는다. 분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더니 누가 빨리 통에 넣나 시합을 한다. 누가(내가) 시킨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새장에 유유자적하는 우리 집 베짱이 1호와 3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참고로 나는 베짱이 2호다. 3만 원에서 300만 원으로 둔갑한 베짱이 1호 호두는 3호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여태 살아 있는데 (죽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우리는 귀찮아서라도 못 먹는 영양제를 그녀는 이유식으로 받아먹고, 배터리가 다 닳아 체중계에 몸무게를 달지 않는 우리는 그래도 호두만큼은 조리용 저울에 무게를 꼬박꼬박 달며 1그램이라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면 우리 집은 비상이다.

새장에 갇힌 처량한 신세라고 누가 그랬던가. 날지 못하는 새라도 광막한 새장 속에서 홀로 횃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녀는 최소한 우리 집에서는 일개미와 베짱이 통합 서열 1순위 가장 존귀한 존재다. 굳이 집안 내에서까지 서열을 따져야 하냐고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거세게 항의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서열 1위로서, 겉으로는 남편의 명명에 항의했으나, 그의 판단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베짱이 1호는 3호의 오른쪽 집게손가락 위에서 여차하면 바닥으로 날아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3호는 2호인 내 눈의 감시망을 피해 마이쭈 한 알이라도 입에 집어넣으려고 이쪽을 째리고 있다.

서열 1위인 줄 알았다가 서열 2위임을 받아들인 나는 날 좋은 가을 내내 호두와 집에서 뒹굴다가 바람 불기 시작하자 걷기 위해 슬슬 워밍업을 한다. 그들 옆에서 나는 스텝퍼에 올라 저 멀리 구름을 뚫고 덜컹이며 철로를 달리는 전철을 본다. 가을, 그 사이에 심폐지구력이 떨어진 나는 금세 소파에 드러누워 감말랭이를 뜯어먹으며 일사불란한 일개미들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이내 나도 몸을 일으켜 일개미 1,2호 옆에서 그들이 착착 준비해 둔 상자를 붉은 리본으로 묶기 시작한다. 얼마나 묶었을까. 안 움직이던 손 근육을 움직였더니 두 손에 몸살이 온 듯 손가락 뼈 마디마다 아우성이다. 삭신이 쑤신다. 상자가 계속 쌓여가므로 어찌어찌 120개 어드밴트 캘린더 리본을 완료했다. 일개미 2호가 먼저 시작해 1호를 독려하고 베짱이 2호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덕분에, 제시간에 모두 넉넉히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 베짱이라고 명명한 덕분에 나는 ‘엄마’ 역할이 아닌, 베짱이라는 캐릭터를 편하게 마음껏 누리고, 둘째는 우리 집에서 가장 어리지만 ‘일개미’를 톡톡히 해내게 되었다. 그 남편이 계속 출장 중이다. 남편은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출장을 간다는 생각을 하며 내 어드밴트 캘린더 3번째 칸을 열어 레몬 사탕 한 알을 꺼내 입에 넣는다.

밤이의 고열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병원에 가려고 나왔다.

가을 내내 붉던 단풍잎은 내 얼굴에 흑자 같은 흙빛 이파리가 되어 잔뜩 오그라들었다. 건드리면 툭 떨어질 것 같은 씨가 허공에 바짝 매달려 있다. 이제는 나무가 그마저도 다 떨어뜨릴 것이다. 큰 바위 얼굴에 때죽나무는 얼어 죽은 듯이 잔뜩 움츠려 있다.

대기는 다스하다. 거리는 첫눈이 그치고 눈석임이 시작되었다. 지나간 발자국으로 옴쏙해진 눈길을 따라 걷는다. 밤이는 밤새 쌓인 눈이 녹아 길이 군데군데 거무스름 해지고, 놀이터에 거뭇거뭇한 바닥을 보며 신기해한다. 어젯밤에 고왔던 눈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머리인지 몸인지 모를 큰 눈덩이 하나가 화단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만들고 무너뜨리며 한껏 즐거웠을 아이들을 떠올리니 후후훗 웃음이 난다. 입안에 머금었던 사탕을 와사삭 깨물었다. 진한 상큼한 단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기분이 한결 낫다.

밤이는 병원에서 독감 주사와 해열제 수액을 맞는다. 멀거니 기다리던 나는 아침을 거른 덕분에 건강 검진 1년 만에야 당뇨와 콜레스테롤 재검사를 위해 피를 뽑는다. 내처 비타민D 주사도 맞는다. 가을 동안 해를 잘 못 본 데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이마저도 온 김에 맞는 게 좋을 듯해서다. 간호사 선생님이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며 노화 방지, 피부와 우울에도 좋다며 3개월마다 맞으라고 살갑게 말씀하신다. 비타민D 주사가 만병 통치약이다.

병원을 나선 밤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 말긋말긋한 눈으로 웃으며 뛰어다니기 시작하다. 나는 눈이 다 사라지기 전에 밤이를 목련 나무 아래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가지 끝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털이 복숭복숭한 겨울눈이 빛줄기를 향해 한껏 위용을 드러낸다.

우리는 카페에 들러 딸기 생크림과 딸기 초코 조각 케이크와 라떼 한 잔을 사서 돌아온다.

간단히 먹을 것을 식탁에 차리는 동안 밤이는 이미 조각 케이크를 다 흡입하고는 어드밴트 캘린더에서 꺼낸 멘토스를 씹으며 방으로 사라진다. 뭐든 먹기 시작하는 걸 보니, 다 나았나 보다.

분주했던 아침을 물리고 나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다시, 나만의 겨울 속으로 빠져 든다. 입 안에서 아침 내내 빨아먹던 사탕 단내가 맴돌았다.


밤이는 주말 동안 푹 쉬고 기침만 남았다. 이제 기말고사를 막 끝낸 첫째의 고열이 시작되었다. 첫째는 쉽사리 열이 내리지 않았다. 험악한 상상을 하며 나도 지칠 즈음,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고 둘째의 초경이 시작된 것이다. 내 염려와 달리 둘째는 가방 안에 필통을 챙기듯 생리대를 꼬박꼬박 챙겨서 학교에 가고,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 거뜬히 다녀왔다고 한다.

정이의 열이 떨어질 즈음, 학원마다 신학기에 바뀐 일정을 내게 보내어 왔다. 다시 레벨 테스트를 보고, 다른 학원에 체험을 가며, 그동안 빠진 학원 보강을 채우는데 쫓아다니던 나는 불현듯 내 인생이 나를 엄마로 적합한지에 대한 시험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연말을 시험을 치러내듯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지기들과 회식을 하다 잔뜩 술에 취한 나는 대리 운전기사님을 기다리다 주차장에서 비틀대며 다 토하고 말았다. 그 밤에 나는 나마저 생리하는 꿈을 꾸다 괴성을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세 여자가 잠든 평온한 밤에 혼자 깨어있던 남편은 ‘오바이트 리’로 나를 부르며 젊다 젊어, 혀를 찼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엄마'는 잘 모르지만 오바이트 리로, 둘째는 ‘뽑기에 도른 자’로 겨울을 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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