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는 건 뭘까

소멸의 풍경

by 이애리

아름답다는 건 말이야,


흰 죽이 끓는다.

"무슨 맛있는 냄새가 나."

코가 밝은 둘째가 주방으로 뛰쳐 들어와 이 밤에 아빠가 무얼 하나 살핀다.

역시 퇴근하자마자 냄새를 맡고 먼저 와 있던 나는 주방을 떠나지 못하고 괜스레 가스레인지 앞에서 맴돈다. 뚜껑을 여는데, 흰 김이 뿜어져 나온다. 퇴근길에 누렇게 뜬 얼굴 위로, 따뜻하고 촉촉한 훈기가 햇살처럼 퍼진다.

팔팔 끓어오른다. 흰 김이 걷히고 난 냄비에 희고 통통한 밥알들이 촉촉하게 뒤엉킨 자태에 입안에 벌써 침이 고인다. 눌어붙지 말라고 나무 숟가락으로 둥글게 젓는다.

밤이의 A형 독감이 잦아들자마자 정이가 독감에 걸려 며칠 비실비실 대더니 배가 아프단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쌀을 불려서 물을 붓고 오랜 시간 동안 끓인 죽을 밥상 위로 내놓는다. 밥상에는 길게 찢은 김장 김치와 익을락 말락 깍두기가 같이 올라와 있다.

환자가 아닌 나는 군침이 돌아 죽 한술을 떠먹는다. 죽 한 숟가락 목구멍을 타고 굴러 넘어가더니 김치가 당기고, 또 흰 죽 한 숟가락에 평소 즐기지 않는 깍두기까지 삼킨다. 저녁상을 차리고 소파에 가 앉은 남편이 나를 보고는 뭘 그렇게 맛있게 먹느냐고 물어본다.


자기야, 아침에 화성에 책 배달을 다녀왔어. 비포장도로에는 첫눈이 녹은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파여서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지. 추수가 끝난 논에는 아직 불을 놓기 전이라 참새떼가 땅에 떨어진 낟알을 쪼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어. 운전석에서 조수석 창 너머로 홀린 듯이 참새떼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검은 하늘이 전면 창을 덮쳐 버리듯이 쇠기러기떼가 몰려와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어. 나도 모르게 운전석 아래로 웅크리게 되었지. 눈이 지나간 자리에 쾌청한 대기와 빈 논과 검은 하늘이 참 인상적인 아침이었어.


지난밤 폭설을 맞이하고 출퇴근길에 잔뜩 움츠린 채 가게와 집을 오갔다. 눈석임이 빠르게 시작되더니 배달 가는 길에 군데군데 웅덩이와 물기가 남아 이른 새벽에 비가 내렸나 싶었다. 첫눈은 물이 되어 고였다가 흐른다.

초등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다. 차고 건조한 냄새가 아닌 축축하고 따스한 청신한 겨울 냄새가 난다. 책을 카트에 싣기 전 손목시계를 보니 배달 완료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주차장 앞으로 걸어가니, 볏짚을 걷어낸 논이 시원하게 트여있다. 여름 내내 뱀이 튀어나오고 개구리가 뛰던 숲은 황량하다. 늦가을 큰 대추알을 따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걷힌 체험 농장에 뱁새 무리가 먹이 활동을 하는지 도손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파리를 다 걷어낸 관목 가지가지마다 오보록하게 모여 그들은 몸을 부풀리며 옮겨 다니느라 바쁘다. 멀리 어룽어룽하는 햇무리가 다사롭다. 이 오롯한 조화로움이 내 마음에 가득, 채워진다.


아름답다는 건 말야.

땅 위로 떨어지는 겨울 빗방울을,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하늘을,

눈 오는 날 날개를 접고 얼음 위에 곤히 잠을 자는 고니를,

붉어지는데 푸르스름한 박명과 해거름을,

벼가 없는 빈 논을,

노을빛이 내려앉은 창밖에 앉은 황조롱이 뒷모습

,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야.


빈 하늘에 채워지는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에

기기기기 끊임없이 울며 이동하는 쇠기러기떼 소리에

어둠 속에 겨울잠을 자고 있을 뱀과 개구리 소리

,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일이야.


이제는 재능도, 앎도, 이파리도,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저절로 알게 되었다.

감치다 잃은 것-오해와 허투루 보낸 시간과 내 사람들-이 많은 지난날을 흘려보낸다. 어렵게 비워지는 마음에 소멸하고 차오르는 자연의 풍경을 그득 담는다. 지나간다, 이 모든 것이.


남편이 회식을 가고 없는 오늘 연말이라 회비 정산을 하다가 왠지 마음이 헛헛해진 나는 김장 시즌에 사둔 배추를 아이스 박스에서 꺼내어 한 장 한 장 딴다. 흐르는 물에 배추 이파리를 꼼꼼히 씻어서 물을 턴다. 배춧잎을 도마 위에 올리고 두꺼운 뿌리 부분을 칼등으로 지그시 누른다. 납작해진 배추밑동을 보고는 밀가루와 튀김가루가 섞인 반죽에 적셔 후라이팬에 올린다. 지긋하게 지지며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식탁을 차린다. 노릇노릇해지는 배춧잎을 보며 배추 단맛과 튀김옷을 입힌 든든한 식감 생각에 반찬을 내놓는 손길이 빨라진다. 배추전을 뒤집을 때마다 찰떡 소리에 몇 번이나 군침을 꿀떡 삼켰는지 모른다.


심심한 맛으로 먹는단다.


커버린 아이들은 이 맛을 알아버렸다. 기름 냄새에 달려드는 아이들은 배추전을 사방으로 찢어서 식초가 곁들여진 간장에 콕하더니, 배추전은 제각각 입속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싱어게인>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tv 앞으로 모인다. ‘다시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는 기획 아래 알려지지 않거나, 잊힌 가수들이 나와 경연을 벌이는 tv 프로그램이다. 다른 시즌과 달리, 나는 자주 울었고, 웃었다. 이 도전자들을 보면 오십을 바라보는 내가 지금도 못할 것이 없겠다는 용기와 꿈이 생긴다.

얼마 전 내 키를 넘어선 정이도 영혼의 단짝 소수빈을 이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소수빈의 열렬한 팬이 된 정이는 팬카페 활동으로 다수의 아줌마들과 바쁘게 지내고 있다. 미래 사윗감에 대한 투자라며 남편과 나는 매번 치열하게 콘서트 티켓을 예매한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정이는 독감에 걸려 참여하지 못했다. 돈이 아까웠던 남편은 시작 직전에 혼자서라도 콘서트에 다녀오마 씻고 나왔지만, 정이는 가족에게 표를 절대 양도하지 않음으로써 티켓값 134000원은 그야말로 종이 쪼가리가 되고 말았다.

소파에 드러눕자, 반대편에 밤이가 드러눕는다. 시어머님을 닮고 남편의 발을 닮은 그녀의 발이 내 입에 걸쳐진다. 우리 위로 이마에 냉각 패드를 붙인 정이도 살살 뛰어와 폴짝 눕는다. 분노가 차오르는 그때 남편이 싱어게인 할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 4시 오픈에 맞춰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는 우락이네 술집에서 술을 마셨단다. 둘이서 마시자고 공유한 비밀 술집을 남편은 회사 후배들이랑 간다. 내가 앞집에 태어난 아기를 보고 셋째 낳자고 영혼 없이 한 말을 새겨듣고 술자리에서 자랑하고 왔단다.

내가 처음부터 찍었던 69호가 올 어게인으로 탑텐에 올라간다. 그러나 15년 동안 가수인지 지망생인지 모를 정체성으로 15년을 기타로 노래만 불렀다는 39호 언니는 떨어졌다.


아름다운 건 말이야.

삶이라고 노랫말로, 기타 음률로 그들은 살아온 궤적을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향유할 수 있는 지금, 나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싱어게인이 끝나고 하염없이 졸다 깬 나는 옆사람을 쳐다본다. 옆사람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를 깨워 부스스한 모습으로 안방으로 향한다.


*<<아름답다는 건 뭘까?>> 아라이 료지와 사이하테 타희의 그림책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