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여섯 알
작년부터 죽음 생각이 자주 든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과거부터 존재한 죽음은 내 미래에까지 이른다. 내가 생각한 답에 가깝게 죽기 위해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자리한 데서 라떼를 기다리는데 창 너머로 어제 내린 눈이 녹은 작은 산책길이 보인다. 사장님께 잠시 걷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출입문을 나선다.
바로 숲이다. 여느 아파트 화단처럼 수종이 대부분 소나무다. 다정한 누군가 솔방울을 방울방울 이어 새 먹이 장식물을 걸어둔 소나무가 있다. 햇살이 든 곳에 눈이 녹아 이끼가 보송하게 솟아있다. 반대편으로 나무의 그림자가 희고 길다. 사선으로 난 흰 그림자를 따라 허리를 수그리고 걷는데, 모과 한 알이 툭 걸린다.
모과 두 알.
모과 세 알.
모과 네 알.
소리내어 세어보다 쪼그리며 앉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모과 다섯 알. 치색이 얼룩덜룩 도는 매끄러운 모과 한 그루 끝에 닿는다. 모과 다섯 알이 고운 체에 걸른 듯한 눈가루가 뿌려진 이파리들 속에 폭 담겨 있다. 불현듯, 답을 찾지 못한 죽음이 떠올라 새삼 휘이이 둘러본다. 모과 나무는 숲 초입에서 멀지 않은 데 있다. 몇 남지 않은 치색빛 이파리들이 사그락 흔들린다. 분명 이 모과 나무는 봉긋한 분홍빛 꽃을 피웠을 것이다.반짝이는 모과 한 알이 가지 끝마다 매달렸을 것이다.
수 해 전 일이다.
집 안의 자랑이었던 듬직한 외사촌 오빠가 죽은 것은.그 몇 해 전 큰고모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몇 해 전에는 큰고모가 돌아가셨다. 외사촌 오빠는 동네에서도 모범적이고 의젓한데다 의리도 있는 부잣집 아들로 입소문이 자자했다. 굳이 한겨울에 주유소 알바를 하면서 기름 보일일러를 떼는 할머니 방에 기름을 넣어주는가 하면,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인 나를 서점에 데려가 이집트 왕 사랑이야기 책을 몰래 사주는 다정한 외사촌오빠였다. 오빠의 창창한 미래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의 누나인 선희 언니와 형부와 함께 소위 놀고 있었다. 갑자기 큰 고모가 뇌출혈로 쓰러져 대학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고 언니를 따라 갔다. 그 당시에 가장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중환자실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정신없이 쫓아다니느라 볼 수 없었던 혁중 오빠가 한 밤이 되어서야,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경주 언니는 언제 오는 거야?"
오빠의 지친 모습이 낯설어서 싹싹하고 착한 오래 사귄 여자 친구인 경주 언니가 빨리 왔으면 바랐다.
"내 탓이다."
오빠가 너무 무심해서 언니가 떠났단다. 그러나 내가 무척이나 따랐던 경주 언니는 새 남자 친구와 병원까지 일부러 와서 오빠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갔다. 바보, 병신 같은 오빠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큰 고모는 돌아가셨다.
아주 오래 전에 할머니, 큰 고모, 둘째 고모, 넷째 고모가 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가난하고 무료했던 어린 시절에 나는 매일 고모 집을 번갈아 가면서 전전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하루는 큰 고모네 가서 언제 올 지 모를 사촌들을 기다리며, 석류 나무 앞에서 매쉬라는 강아지와 놀고, 하루는 둘째고모 식당에 찾아가서 손님 구경을 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막내 고모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나랑 친한 작은 고모들은 혼자인 나를 딱하게 여겨 온갖 이야기를 다해 주었는데, 무뚝뚝한 큰 고모는 안방으로 나를 불러다 놓는 게 다였다. 고모와 둘이서 지루했던 나는 큰 창 너머 향나무를 쳐다보거나, 전축 위에 놓여있던 소쿠리에 담긴 황금빛 모과 몇 알을 만지며 놀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고, 작은 고모들도 모두 타지로 떠났지만, 큰 고모는 오랫동안 동네를, 할머니 곁을 지켰다. 이 집에 막내 딸이나 다름 없었던 나는, 큰 고모와 혁중 오빠 덕분에 노쇠한 할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큰 고모가 먼저 죽고, 친할머니가 죽고, 큰 고모부가 죽었다. 부모를 잃고, 둘째 고모 말에 따르면 오줄이 없는 누나를 뒷바라지를 하는, 덩치 큰 고아가 된 혁중 오빠가 내 어린 눈에도 무척 안쓰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룬 혁중 오빠는 "애리야,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노" 종종 말했다. 학원을 차리고, 보험 일을 하다 그마저도 잘 안 됐는지 오빠는 호주에 간다고 했다. 자리를 잡으면 올케와 딸을 데리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오빠는 다리가 몸뚱이 만큼 붓는 병에 걸려 돌아왔다. 고모들과 나는 포항 변두리에 있는 병원에 누운 군인이었을 때보다 빼짝 마른 오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고모들에게 친언니보다 더 살가운 첫 조카는 아들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누워만 있는 오빠를 보고 통곡했다. 고모들이 엉엉 우는 소리가 병원 밖으로 슬프게 들려왔다.
서울에 치료를 받으러 온다기에, 곧 낫는가 싶었다. 낫고 싶은 의지가 컸던 오빠는 서울 원자력 병원으로 자주 오가갔다. 어느 날 돈이 없다는 말을 했다. 큰 고모대에서 축적한 그 많은 돈이 사라진 게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나쁜 생각도 들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에 보험도 다 해약한 상태여서 보험 처리도 안 돼 돈이 하나도 없단다. 믿을 수 없었다. 보험 설계사도 했던 사람이, 자기 보험은 다 해약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는 오빠는 그렇게, 이른 말년을 겪고 있었다. 두 아이를 낳고 정신 없이 살던 나한테는 오빠의 불행한 삶이 막막해 보였다. 왜 모든 불행이 오빠에게 닥쳐왔던 걸까,궁금했다.
KTX를 타고 버스를 타며 혼자 병원에 찾았던 날, 오빠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올케 언니가 자리를 비운 틈에, 나는 오빠 귀에 속삭였다. 조카를 잘 챙길테니, 걱정말라고. 오빠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죽음 앞에서 누구나 달관할 수는 없구거구나. 아이가 되기도 하는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오빠를 본 건 장례식장에서였다. 큰 고모가 죽고, 큰 고모부가 죽고, 할머니가 죽고, 외사촌 오빠가 죽었다. 한 가문이 사라졌다. 한 동네가 사라졌다. 한 산이 사라졌다.
한동안 모과를 잊었다. 다시 모과가 떠오른 것은, 두 아이가 태어나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서성이게 되던 때부터 였다. 얼룩덜룩한 표피를 지닌 모과 나무를 발견하고, 핑크빛 소담한 꽃을 기다리고, 연두빛 건강한 초여름 모과를 보며 감탄했다. 내가 만졌던 끈적한 황금빛 모과를 떠올리며, 나무 끝에 매달린 모과가 얼른 익기를 기다렸다. 여행 간 데 모과나무는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열리는데, 내가 익기를 기다리는 모과는 떨어질까 염려스러운 겨우 한 알 이었다. 그것은 익기도 전에 떨어져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데 올 여름에 빛을 잃은 초록 과피에 갈색 멍이 든 모과를 화단에서 여럿 발견했다. 그대로 썩는 게 아까워 몇 알 주워 와서 차에 하나 두고, 집에 들고와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큰 고모네 모과를 떠올리며 노랗게 되기를 다시 기다렸다. 몇 달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을까. 벌레가 생긴데다, 더 크고 짙은 진흙색 멍이 번져서 비닐 봉지에 담겨 친친 감기어 모과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렸다.
눈이 녹아 젖은 땅에는 숨어있던 푸른 빛 이끼가 드러난다. 한 여름 햇살에 떨어졌을 모과는 낙엽과 이끼 속에 묻혀 흰 눈을 받아내며 썩는다. 따스한 봄이 되고, 찬란한 햇살을 받는 여름이 오면, 모과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흙이 되겠지.
카페로 돌아오는 길, 까만 모과 한 알이 발에 채인다. 이렇게 모과는 끊임없이 내게로 굴러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