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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계절걷기 11화

계절 걷기

눈이 내린다.

by 이애리

흰 눈이 정수리에, 두 눈에, 입술에, 가슴에. 내린다. 리 아이들 물 같은 흰 눈이 쉬지 않고 내렸다. 베란다에 앉아 하얀 아파트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얼마 전에 117년 만에 내렸다는 폭설이 또 올 지도 모른다는 각을 한다.

20층에 사는 J가 싸락 눈을 맞으며 이사를 간다. 베란다 창 너머로 은색 크레인이 우리 집 아래로 덜컹덜컹 내려가는데, 나는 차마 나가서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지 는다. 오히려 출근길에 이삿짐을 내리는 J를 만날까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 눈이 내린 길을 혼자 걷다가 하얀 개 두 마리를 산책시키는 J를 만났다.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의 표정은 눈 위에서 밝게 빛났다. 웃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지난 일요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J는 다음 주에 이사를 간다는 말을 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J에게서 직접 이사 간다는 말을 막상 듣자, 쓸쓸하고 생경한 기분이 든다. 처음 J가 이사를 왔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마다 해바라기처럼 씩씩하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 그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드문드문 볼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큰 딸 뒤에서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견고해 보이는 금빛으로 마감된 엘리베이터 안 모서리에 간신히 기대어 살아 있었다. 그 모습은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것도 아닌. 이 세상에 걸쳐있는 듯한. 감히 먼저 인사도 하지 못할 것이라, 자주 모른 척했다.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우고, 어디로, 왜 가느냐고 그제야 물었던가. 우리는 늘 말을 아꼈던 사이였지만, 갑자기 J는 봇물 터지듯 그간의 이야기를 토해낸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었까. 자주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어벙벙하게 듣다가, 휩쓸려 오는 시간에 밀려 다급히 이별을 한다. 왜 그날도 그냥 헤어졌을까.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만나자는 입바른 인사도 할 수 없었을까. 왜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두 강아지가 어서 가자고, J를 흰 눈 속으로 끈다. 우리는 어떤 약속 없이, 손을 흔들며 반대편 길로 각자 걸어간다. 부러 반대편으로 갔던 것일까.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내가 아는 이야기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서, 어쩌면 너무 뻔한 과정과 진부한 결말을 알기 때문에, 이야기 끝에는 뜩 웅크린 질문만 남는다.

이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쓸쓸하고 가혹한 엔딩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예를 들자면,

며칠 전 내가 일하는 가게에 한 엄마가 습격하다시피 들이닥쳐 자신의 딸을 괴롭힌 아이을 불러었고,

오랜만에 길 한가운데서 만난 어떤 엄마는 자신의 아들에게 기절놀이를 한 가해자 이야기 담담히 하고,

친한 지인의 약한 막내딸 주변에 늘 가해자들이 모여들어, 시름이 고.

혹은 모든 게 에게도 낯설지 않 이야기.

"우리 피해자는"

한동안 이렇게 시작하는 말로 나는 나를, 우리 모녀를 피해자로 스스로 낙인찍으며 말했다.

치는 사람들 이야기 중에서도 나는 유독

이런 이야기가 잘 들리고 더 잘 보인다. 카페에 앉아있어도 다른 테이블에서 오고 가는 대화에서 '학폭'이라는 단어가 내게 계속 꽂힌다.

J 도, 그 엄마도, 그 엄마도, 그 엄마도, 그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숨길 데 없이 삐져나오는 무력한 나의 몸짓과 눈빛을 알아보고 나한테 다 쏟아냈으리라. 나도 한 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질문이 남는 삶이 계속 쌓이면, 진득하고 습한 무력감이 전신과 정신을 엄습해 넋이 나가고, 눈물도 나지 않으며, 말도 오가지 않는 지옥을 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알아본다. 비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새어 나오는 무기력함을 알아챈다.


눈이 녹지 않아 얼음길이 된 대편 산책로에서 J와 두 마리 강아지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또 만났다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J는 J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각자 걸어갔다. 그렇게 J를 보냈다.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K선생님이 사회자로 하는 그림책 수업에서, 선생님은 요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평범한 안부를 묻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다가 품고 있던 질문에 답을 찾아가곤 하는데, 그때도 그런 날이었다. 나는 풀리지 않는 원망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과정에 사실, 잔뜩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대신에, 그건 괜찮은 일이라고 했다. 우리를 피해자로 규정지으며 엄마가 해결해 줄 일이 아니라, 이것은 아이의 일이고, 내가 아는 아이는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 눈을 바라보고 말씀하셨다.

그럼 누가 알아주나요!

나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에 내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고, 사람들 사이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K선생님을 미워하며 욕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계속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이는 오늘만 살면 안 되는 건데. 오늘도 피해자로서 엄마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면, 내년에는, 고등학생이 되면, 대학생이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우리는 피해자여야 할까.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아이는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 웅덩이를 아이가 스스로 지나야 만, 아이도 아이답게 살아갈 수가 있을 텐데. 어른이 되어도 그다지 녹록지가 않아.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선택하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그것이 아이의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엄마가 되는 순간,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의 가슴은 뜨거워질 새 없이, 냉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K선생님의 한 말씀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그 이야기 언저리에서 계속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며칠 화단과 화장실을 깨어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출근하는 길에 지하 주차장 한 켠에 가득 쌓아둔 벽돌과 모르타르 포대 자루를 본다. 화단과 화장실이 사라진 그 자리에 벽돌이 차곡차곡 쌓이는 상상을 하며, J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어디로 이사를 갔을까. 저절로 우리 피해자라고 말하게 된 사람들. 억울한 사람은 어디서 헤매다 스르르 스며들어야 하나. 문득 물음이 이어지는 아침, 체머리를 흔들며 발길을 돌린다.


밤새 눈이 내리려나 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고 싶어, 퇴근하는 길에는 J를 만났던 1층 입구로 향한다. 어둠 속 길을 밝히는 눈 위로, 자박자박 홀로 걷는다. 하얀 눈 위에서 나는 J를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공상을 한다. 회색빛 공상 속에서 그녀의 다 크지 못한 딸의 눈을 맞추고 어떻게든 살자며 시린 가슴으로 안아준다.

갑자기 두 아이가 뛰쳐나와 눈싸움을 하잖다. 까만 밤, 우리는 오늘 눈이 유독 잘 뭉쳐진다는 둥, 깨끗한 흰 눈이라는 둥, 운이 좋은 날이라며 꺅꺅대며 눈싸움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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