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걷는 일
지인이 아파트 산책 중에 오색 딱따구리를 만났단다.
우리 아파트에서 오색 딱따구리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2년 가을이었다. 떫은 감을 파먹는 청딱따구리와 한 날 동시에 발견했던, 그날은 계 탄 날.
얼마 전에 동박새가 아파트 여기저기서 출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동안 아파트 트랙을 수십 번 돌았는데 이번에는 오색 딱따구리다. 텃새라 마음먹으면 언젠가는 보고야 말겠지만 눈이 내려 흰 빛과 대비되는 머리 꼭대기가 검고 뒷목에 심홍색 무늬가 있는 오색이가 아른거려 속초에서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내내 나는 앓기 시작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지인은 현장을 생중계하듯 오색이가 자작나무줄기를 아작 낼 듯이 쪼아댄다며 동영상까지 보낸다. 사실 나무는 그렇게 약하지가 않다. 오색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벌레를 찾아 먹으니 깨끗하게 청소가 된 나무는 치유력도 자연스레 좋아져서 나무 입장에서는 오색 딱따구리가 꼭 필요한 존재다.
나는 하얀 눈을 맞으며 흰 자작나무에 구멍을 내는 오색빛깔 오색 딱따구리를 보기 위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젖지 않는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산새인 그 새를 보려면 설악산에서 더 잘 보였을 텐데, 왜 굳이 이 아파트에서 오색이를 찾는 것인가. 나는 일부러 탐조 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타지에서는 애써서 새를 보지 않는다. 속초에 가서도 드높은 하늘을 선회하는 맹금류 한 마리를 멀찌감치서 봤을 뿐이다. 그저 나와 서식지가 같은 동네 친구들이 더 각별하고 애틋하다.
지금 가까운 일월 저수지나 서호공원에 가면 얼은 물 위에서 눈 맞으며 잠자는 상상 속 백조를 볼 수 있지만, 내게는 아파트 안에 구석진 벤치에서 햇볕을 쬐는 흔한 참새 무리나 어느 나무에서든 시끄럽게 울어대는 친근한 직박구리가 더 반갑다.
탐조 여행보다는 아파트 탐조를 즐기 듯 걷기도 일상적인 게 좋다. 매일 채비를 해서 나서는 것보다 집에 가다가, 슈퍼에 가다가 겸사겸사 두 세 바퀴를 걷는 밀착된 걷기를 즐긴다. 집과 상가를 오가는 일이 더 잦아진 겨울 방학에는 틈틈이 10분, 20분씩 자투리 시간을 내어 걸을 수 있는 아파트 트랙이 나에게는 더 안성맞춤이다. 하루 만 보 걷기를 다짐하고 걸음을 세면서 걸을 때는 단조로운 이 길이, 일상적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공간이 된다. 아름다운 길과 매혹적인 길, 대한민국 꼭 걸어봐야 할 100선 길도 꽤 걸어봤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은 아파트 트랙이다.
우리 동 1-2라인 현관문을 나서면 털복숭이 겨울눈 껍질을 하나둘씩 벗겨내며 하늘을 향해 웅장하게 가지를 뻗은 격조 있는 목련 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 나무 꼭대기에 앉아 경박스럽게 끄악끄악 내지르는 직박구리 울음소리를 뒤로 하며 놀이터를 지나간다.
모퉁이에 맨들맨들한 빛을 잃은 모과나무를 지나쳐 필로티 아래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햇살을 내리받으며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착각이 들게 하는 단풍나무가 샤라락샤라락 눈부신 소리를 내며 흔들흔들 댄다. 나는 이토록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빛깔과 모양으로 움직이는 나무를 단풍나무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바람이 모여들어 마른 벽돌색 이파리들이 소리를 내며 떠는데 수십 마리의 되새들이 날아든다. 사계절, 내는 색만큼이나 소리마저 다채한 단풍나무의 향연이다.
가지치기로 단장된 수십 마리의 참새들이 숨어들었을 화살나무 화단을 지나쳐 정문상가로 가는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왼켠에 산수유나무 밭에 산수유꽃이 이른 봄부터 늦은 봄까지 노랗게 빛나더니, 어느새 단단한 연두과육이 열리고 또 새빨개진다. 열매는 겨울 눈을 맞으며 쪼글쪼글해지는가 싶은데, 늦겨울에 먹거리가 부족한 직박구리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 나머지는 달린 채로 말라가고, 어느 폭설에 후두둑 떨어져 하얗게 언 땅에 빨간 별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내리막길 끝에 다다르면 귀신처럼 머리를 늘어뜨린 아담한 단풍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둘째 밤이가 자기 나무로 콕 찍었다. 밤이가 더 아이였을 때 진드기가 가득 붙어있는 붉은 가지 속으로 종종 사라지고는 했더랬다. 단풍나무는 연둣빛 순이 나오며부터 진드기가 보이기 시작해, 붉은 이파리가 될 즈음에는 나무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진드기가 온 나무를 뒤덮는다. 그러나 이마저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드기는 새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는 데다가, 몸살을 앓기는 해도 나무가 그 정도로는 끄덕 이 없다.
물론 벚나무에도 송충이가 들끓으며 행인 머리 위로 떨어지면 아파트 내 수목 소독이 시작된다. 그나마 우리 아파트는 수목 소독이 없는 편인 데다 약성이 약해 산새들이 날아들고 다양한 종(?!)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탐조를 하려고 라떼를 사러 서문으로 나간다. 겨울은 탐조를 하기에 좋은 시기지만, 나무만을 오롯이 관찰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끈적끈적한 기름으로 무장한 겨울눈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불뚝불뚝 솟아있고 줄기가 흙빛을 띄는 우람한 칠엽수를 만난다. 지난여름 칠엽수 큰 이파리는 얼마나 탐스러웠으며, 가을에 누렇게 물드는 이파리는 또 얼마나 황홀했던지. 한 우주 앞에서 그저 미물인 나를 저절로 인식하게 된다.
일요일 늦은 오후, 저녁 만찬을 이미 준비한 듯 나무와 새들이 잠잠하다. 사진 속 오색 딱따구리가 파 놓은 자작나무 앞에 도서관에 다녀온 아이들이 백팩을 메고 옹기종기 모여 재잘댄다. 겨울을 나는 새들을 위해 이웃이 114동 화단에 매달아 놓은 먹이통은 흔들리지 않는다.
곧 해가 다 내려올 것 같다. 기민한 눈초리로 빠르게 나무를 훑으며 초록 우레탄이 깔린 트랙을 휙휙 돈다. 내 앞에는 건드리면 튕겨나갈 정도의 속도로 양팔을 휘저으며 양다리를 양껏 찢어 걷는 걷기 동료가 있다. 그분에게 뒤질세라, 나도 파워워킹을 한다. 걷기 동료를 좇아 몇 바퀴를 쌩쌩 돌았다. 빠르게 걷느라 숨소리가 거칠었을까. 얼을까 귀까지 덮은 털모자 때문일까. 더 이상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재잘대던 아이들 소리가 흩어진다. 젖지 않는 운동화는 여전히 깨끗하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5시 57분. 트랙을 따라 낮게 둘러진 미색 가로등불이 촤르륵 켜진다. 내 앞에는 흙색을 간직하고 흰 빛을 발산하는 나무를 관객으로 하는 눈부신 나의 웨딩트랙이 펼쳐진다. 바람이 뺨을 스치며 푸르스름한 대숲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온다. 봄이 오면 오색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 안에 들어찰 새끼들을 상상하며 유유하게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