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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계절걷기 13화

계절 걷기

하얀 눈은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by 이애리

겨울이 오고, 방학이 되었다.

마음이 늘어질 새도 없이,

아이들은 아침 방학 특강을 시작하고

나는 여전히 아침에 걷고,

낮에 일을 나간다.


오늘 몇 달 만에 일요일에 늦잠을 잤다.

주말에 일이 없는 날이 잘 없거니와,

아이들 보강과 학원 수업으로 주말에도 평일처럼 7시 반이면 눈을 뜬다. 아침 잠이 많은 나에겐 꽤 부지런한 주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반드시 집콕을 하는 게 나의 목표였다.


잠을 푹 잤기 때문일까.

창 너머 밤새 내린 눈이 덮인 들판을 달리는

전철을 보니, 갑자기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꾸물 거리면 결심이 사라질까봐,

긴 니트부터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다.

김 올라오는 하얀 거품이 몽글거리는 라떼를 마실 생각에 흥분된다.

"아점은 뚜레쥬르에서 브런치"

라고 외치자, 아이들과 이끼도 후다닥 옷을 입는다.


나는 여러 색 털이 달린 긴 솔을 챙기고는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겨울이 되면, 겨울이 된다고 해도,

사람만큼이나 새들도 여유를 부릴 수가 없나보다.

어제 '작은 숲' 산책길을 걷다가,

나뭇가지가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익숙한 이 소리는!

작고 날카로운 섬세한 눈으로 하늘을 째려보니, 까치 한 마리가 둥지를 지으면서

나뭇가지를 계속 흘리고 있다.

쯧.


부부 인 양, 또 한 마리가 내 곁에서 나뭇가지를 골라 입으로 물고 그 둥지로 올라간다.

1월 초, 벌써부터 둥지를 짓는 까치부부는 부지런한 것인지, 새내기인 것인지.

아직 세찬 바람이 몇 번 더 올 듯 한데, 한 달이나 앞서 둥지를 짓는다. 게다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산책로 초입에 소나무 높이 떡하니, 거처를 마련하는 기개란!


갑자기 몇 해 전에 우리 아파트 가장 음습한 곳 소나무에 마련한 인공 새집이 생각이 났다. 원래는 새 번식기가 끝나면 청소를 하고 새로운 새 가족을 맞아야 하는데, 가장 음습한 곳에 걸어두고는 무서워서 화단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처음에 새집을 달 때는 분명히

사람이 잘 없고, 천적이 잘 없을 것 같은 이 곳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이 나무야!"

하고 새집을 달 나무를 운명처럼 알아보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난 인공새집을 달고는 문을 몇 년 째 열어보지도 못했다.

뱀이 들어가 있거나, 다른 생명체가 있다면?!

문을 열고 그 안을 대면할 자신도 없었다.

난 멀리서 새 보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집에 있는 잉꼬도 못만지는 쫄보다.

그저 박새가 몇 번 그 곳을 들락날락 거리며

새끼를 기다리는 내게 기대감만 몇 번 주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결국, 새들은 우리가 만들어 준 곳에서 둥지를 틀지는 않았다. 이유인즉슨,

사람들이 그 곳에서 담배를 피러 자주 오거나, 새들도 오기엔 너무 으스스 했던 탓은 아닐까

혼자 분석해 보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처럼 새 보기를 좋아하는 친한 지인이 용감하게 그 새집 문을 열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어여, 청소해.나뭇잎이랑 이끼가 가득하더라."

일침을 가했다.


'언니가 문 연 김에 청소 좀 해주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 삼켰다.

그리고 올 봄에는 꼭 청소해서 해 잘드는 깊고 높은 곳에 새집을 이사시켜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눈이 하아얗게 덮인 화단을 내려다 보는데,

오늘은 왠지 음습한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얀 눈이 높게 쌓인 땅을 보자 들어갈 마음이 생긴다. 드디어 화단 안으로 들어선다. 흰 눈 아래로 무엇이 있든 왠지 겁 나지 않았다.


"둥지 문 열어봐!"

내가 청소하기에는 새집이 너무 높이 달려있네.


비록 이끼를 시켰으나,

하얀 눈이 덮여 고요한 화단에 들어섰고

새집 문을 열었고

나뭇잎 뭉치를 끄집어 내었다.

그동안 내가 점지해둔 해 잘 들고 눈에 잘 안 띄는

향나무 높은 곳에 공새집을 다시 달 수 있었다.


박새. 곤줄박이.

얘들아,

언니도 몇 년 만에 용기를 내어 용감하게 썩은 나뭇잎 뭉치를 털어내었듯이

너희도 몸을 부풀어 추운 겨울을 잘 나고,

이사한 새집에서 둥지를 잘 틀길 바라.

마음으로 빌었다.


'작은 숲'에서 둥지를 만들던 까치 부부도 떠오른다.

까치부부야, 부디 좋은 집 짓길 바라.

마음으로 또 빌었다.


오늘 내리는 눈은 잘 뭉쳐지는 성질의 눈이라

눈싸움까지 마친 우리는 브런치가 아닌, 런치를 하러 뚜레주르로 향한다.


나는 라떼의 하얀 거품을 상상하며 제일 빠르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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