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은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겨울이 오고, 방학이 되었다.
마음이 늘어질 새도 없이,
아이들은 아침 방학 특강을 시작하고
나는 여전히 아침에 걷고,
낮에 일을 나간다.
오늘 몇 달 만에 일요일에 늦잠을 잤다.
주말에 일이 없는 날이 잘 없거니와,
아이들 보강과 학원 수업으로 주말에도 평일처럼 7시 반이면 눈을 뜬다. 아침 잠이 많은 나에겐 꽤 부지런한 주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반드시 집콕을 하는 게 나의 목표였다.
잠을 푹 잤기 때문일까.
창 너머 밤새 내린 눈이 덮인 들판을 달리는
전철을 보니, 갑자기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꾸물 거리면 결심이 사라질까봐,
긴 니트부터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다.
김 올라오는 하얀 거품이 몽글거리는 라떼를 마실 생각에 흥분된다.
"아점은 뚜레쥬르에서 브런치"
라고 외치자, 아이들과 이끼도 후다닥 옷을 입는다.
나는 여러 색 털이 달린 긴 솔을 챙기고는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겨울이 되면, 겨울이 된다고 해도,
사람만큼이나 새들도 여유를 부릴 수가 없나보다.
어제 '작은 숲' 산책길을 걷다가,
나뭇가지가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익숙한 이 소리는!
작고 날카로운 섬세한 눈으로 하늘을 째려보니, 까치 한 마리가 둥지를 지으면서
나뭇가지를 계속 흘리고 있다.
쯧.
부부 인 양, 또 한 마리가 내 곁에서 나뭇가지를 골라 입으로 물고 그 둥지로 올라간다.
1월 초, 벌써부터 둥지를 짓는 까치부부는 부지런한 것인지, 새내기인 것인지.
아직 세찬 바람이 몇 번 더 올 듯 한데, 한 달이나 앞서 둥지를 짓는다. 게다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산책로 초입에 소나무 높이 떡하니, 거처를 마련하는 기개란!
갑자기 몇 해 전에 우리 아파트 가장 음습한 곳 소나무에 마련한 인공 새집이 생각이 났다. 원래는 새 번식기가 끝나면 청소를 하고 새로운 새 가족을 맞아야 하는데, 가장 음습한 곳에 걸어두고는 무서워서 화단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처음에 새집을 달 때는 분명히
사람이 잘 없고, 천적이 잘 없을 것 같은 이 곳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이 나무야!"
하고 새집을 달 나무를 운명처럼 알아보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난 인공새집을 달고는 문을 몇 년 째 열어보지도 못했다.
뱀이 들어가 있거나, 다른 생명체가 있다면?!
문을 열고 그 안을 대면할 자신도 없었다.
난 멀리서 새 보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집에 있는 잉꼬도 못만지는 쫄보다.
그저 박새가 몇 번 그 곳을 들락날락 거리며
새끼를 기다리는 내게 기대감만 몇 번 주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결국, 새들은 우리가 만들어 준 곳에서 둥지를 틀지는 않았다. 이유인즉슨,
사람들이 그 곳에서 담배를 피러 자주 오거나, 새들도 오기엔 너무 으스스 했던 탓은 아닐까
혼자 분석해 보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처럼 새 보기를 좋아하는 친한 지인이 용감하게 그 새집 문을 열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어여, 청소해.나뭇잎이랑 이끼가 가득하더라."
일침을 가했다.
'언니가 문 연 김에 청소 좀 해주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 삼켰다.
그리고 올 봄에는 꼭 청소해서 해 잘드는 깊고 높은 곳에 새집을 이사시켜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눈이 하아얗게 덮인 화단을 내려다 보는데,
오늘은 왠지 음습한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얀 눈이 높게 쌓인 땅을 보자 들어갈 마음이 생긴다. 드디어 화단 안으로 들어선다. 흰 눈 아래로 무엇이 있든 왠지 겁 나지 않았다.
"둥지 문 열어봐!"
내가 청소하기에는 새집이 너무 높이 달려있네.
비록 이끼를 시켰으나,
하얀 눈이 덮여 고요한 화단에 들어섰고
새집 문을 열었고
나뭇잎 뭉치를 끄집어 내었다.
그동안 내가 점지해둔 해 잘 들고 눈에 잘 안 띄는
향나무 높은 곳에 인공새집을 다시 달 수 있었다.
박새. 곤줄박이.
얘들아,
언니도 몇 년 만에 용기를 내어 용감하게 썩은 나뭇잎 뭉치를 털어내었듯이
너희도 몸을 부풀어 추운 겨울을 잘 나고,
이사한 새집에서 둥지를 잘 틀길 바라.
마음으로 빌었다.
'작은 숲'에서 둥지를 만들던 까치 부부도 떠오른다.
까치부부야, 부디 좋은 집 짓길 바라.
마음으로 또 빌었다.
오늘 내리는 눈은 잘 뭉쳐지는 성질의 눈이라
눈싸움까지 마친 우리는 브런치가 아닌, 런치를 하러 뚜레주르로 향한다.
나는 라떼의 하얀 거품을 상상하며 제일 빠르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