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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주작은행성 Jun 13. 2023

화자의 일기쓰기 9

오늘의 화자는 없습니다.

버스에서 바라본 흐릿한 날씨는 모든 것을 보여줄 듯 투명해요.

네온사인이 위험한 것처럼 깜빡이다가 빗방울 사이로 도망친다.

빗물이 맺힌 창문에 얼굴을 대면 한기가 돌고,

손가락으로 쓸모없는 낙서를 해보곤 입김을 분다.


너무 다 보여서,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곧 종점인데, 이제 내릴 곳을 정해야 하는데.


환상은 점점 또렷하게 지나간 장면을 보여주고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몸이 작아진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며 버스를 기다린다.

덩어리진 밤 사이

또렷한 눈동자들이 깜빡인다.


저 버스일까, 이번에는 내릴까.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땅에 그려진 그림을 다시 지우며


똑같은 노래를 매번 다르게 부르자

기다리는 건 너무 지루하고

입은 쉽게도 얼어붙는다


볼을 부풀리고 입을 크게 뻥끗

왜 노래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간다.

 

눈동자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려야 할 시간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씩씩하게 일어선다


종점에는 아무런 낙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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