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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와 민낯

얼굴에 물감을 칠해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by 아주작은행성
천서혜밴드 - STAR BLOSSOM

요즘 기침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관지가 많이 나빠진 모양이다. 마스크를 써서 많이 답답하다. 전반적으로 3월은 답답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많은 프로젝트들이 수주되지 못했다. 많은 악몽에 시달렸다. 대부분은 죽는 꿈이었다. 칼에 내 목이 잘리거나, 총에 맞거나. 내가 죽지 않으면 작은 마을 혹은 소도시에 핵폭탄이 떨어져 다 죽었다. 작은 방에 갇혀 한 아이를 죽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늙은 노파가 그려진 그림을 잠에서 깰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팀장 직급이 되고 나서는 상사와 후배들과 많은 대화를 해야했다. 다양한 목표를 세우거나 팀과 회사의 방향성을 고민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었고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이 힘들거나 분노에 휩싸일 때, 하고싶은 말을 못하거나 누구에게 건네는지도 모르는 말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를 때는 시집으로 도망쳤다. 심리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심리상담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 때 시집을 읽었다. 얼굴에 물감을 칠해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육체를 아무리 씻어도 맑아지지 않을 때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소문과 무성한 일들로 괴로울 때는 신이인 시집을 읽었고

자꾸 내가 진솔하지 못하고 거짓말과 어폐가 늘어난다고 생각이 들 때는 김승일 시집을 읽었다.

혼자만의 생각이 필요하거나 도시 안에서의 삶이 힘들 때는 황인찬 시집을 읽었고

사람도 싫고 이 세상도 싫고 모든 게 무기력하고 다 버리고 싶을 때는 송승언 시집을 읽었다.


다양한 시집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시집을 정하고 읽었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시집을 읽고나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과거에 비하여 삶이 힘들거나 괴롭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다만 압박감과 책임감은 과거에 비하여 커진 것이 느껴진다.

과거에는 불안했다면 지금은 걱정이 많아졌다.


주변을 걱정하고 나를 돌아본다.

이게 보살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깨끗하게 잠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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