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미제 사건 이곳에서 사건이 발생했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 심증도 물증도 없다. 단서는 타고남은 잿더미와 두 권의 책. 잿더미에 불을 켜본다. 책 속의 단서를 찾아가보자. 책 속에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불을 켜는 행위, 장소에 대한 증언과 진술의 반복. 반복.
모닥불이 이곳을 밝히고 이곳을 비춘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1. 특정 기억에 대한 회고의 가능성 시인의 시가 특정 트라우마와 연관된 공간의 기억이라면 혹은 개인의 경험에 연관된 것이라면 감정이나 화자가 두드러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 속 공간에는 상황에 대한 진술만 있다. 진술을 따라가면서 물체 혹은 상황이 나타나지만 나타난 물체/상황은 누구와 연결되거나 다른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 그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진술한다. 이것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특정 기억을 회상할 때 기억은 시간 순으로 나열되지 않는다. 기억은 과거에서 현재 순으로 재생되지 않는다. 뒤죽박죽 섞인 기억의 파편들은 빠칭코의 룰렛처럼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온다. 시인의 시는 뒤죽박죽 속에 튀어나온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보기에 어렵다. 사건의 일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시간대의 순서가 너무 방대하다. 그러한 점에서 특정 공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고 봐야한다. 시인은 기억의 현상이 아닌 시간 흐름에 따른 공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특정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스토리를 알아 달라고, 기억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의 시는 목격자이자 증인의 증언과 같은 진술이 나오는 것에 반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왜 감정이 두드려지지도 않을까? 트라우마, 혹은 특정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면 왜 시인은 감정과 화자가 희미한 진술을 반복하는 것일까.
시 속 화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공간의 여러 시간대의 모습을 불러와 시간의 층계를 형성한다. 그러한 층계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으나 시간 순서에 따라 말하는 공간의 대상이 달라진다. 화자는 시간을 쌓아온 공간을 보며 사건과 일대기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 속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층계가 쌓여온 공간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화자의 시선은 하나임이 분명한데 어느 시선에서 바라본 진술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시 속의 화자의 시선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공간 전체의 맥락을 이야기한다. 화자는 분명 심사도법_A(시 속 공간) 위에 존재한다. 즉 화자의 공간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화자는 심사도법_A(시 속 공간) 시선으로 정사도법_C(공간을 벗어난 시간)에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개인의 시선도 아니고 절대자의 시선도 아니다. 시선을 벗어난 소실점. 평사도법_B(공간속의 시간의 흐름) 위의 공간 자체의 시선이다.
시인은 화자(공간)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특정 공간에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증인과 같은 타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허나 시인의 시 속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도 없다. 되려 왜 신적인 존재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한다. 왜 시인의 시 속에서는 초월한 화자가 등장하며 초월한 화자는 무엇을 진술하는 것일까.
2. 화자는 무엇을 진술하는가 무엇을 진술하는 가에 앞서 살펴볼 작품이 있다. 여러관점에서 사건을 진술할 때 생기는 문제를 다룬 영화 '라쇼몽'이다.
라쇼몽 [1950] 1950년 일본의 영화 ‘라쇼몽’은 ‘타조마로’, ’마사코’, ‘타케히로’라는 등장인물이 하나의 사건에 관한 각각의 진술과 3명의 사건을 숨어서 바라본 ‘나무꾼’의 진술까지 더하여 총 4명의 진술을 ‘승려’라는 인물이 들으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영화다. 이 사건의 등장인물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여 사건을 왜곡시킨다. ‘승려’는 하나된 사건을 4가지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4가지 관점으로 볼 때 사건의 진실은 되려 알 수 없게 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증인도 없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된다. 현대에서는 현상을 왜곡하는 묘사로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서술 트릭 기법을 ‘라쇼몽 기법’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시인은 신적인 존재 혹은 비인간적 언어자들의 말을 빌려 진술한다. 시 속 화자는 함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진술할 생각도 없다. 정보를 왜곡시킬 의향도 없다. 개인적 감정과 추억을 걷어내고 사실과 기억을 진술한다. 사물 혹은 감정의 연대가 발생하면 기억의 왜곡이 생긴다. 객체의 의견으로써 독자를 설득하게 된다.
시인이 말하고자 바는 객체와 감정이 아니다. 사실과 진실이다. 이곳에 일이 있었었다 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화자에 대한 리스트만 남길 뿐 어떠한 설득도 하지 않는다. 특정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공간의 조망자로서 공간의 타임라인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뿐이다. 보존에 개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투명한 정직함이 필요하다.
공간의 조망자로서 화자의 진술은 스핑크스의 질문과 같다.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특정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에 대한 진술이자 질문의 이미지화다. 화자는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상대방을 불리하게 하지 않는 진술로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증언이 아님을 전달한다. 공감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진술, 참과 거짓을 판별하기 위한 진술만을 한다. 진술의 객관화를 실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진술 때문에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화자의 어느 진술이 참인 진술인지 알 수 없다. 독자는 화자의 진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느 진술을 남기고 믿을 것인가에 대한 혼란이 발생한다.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미지화가 되어 전달되는 과정에서 독자는 뚜렷한 메시지를 받기보다 단서를 보고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3.왜 타임라인을 진술하는가 공간의 조망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인의 시에서 등장하는 잿더미는 공간의 시작이 된다. 잿더미에 불을 밝히는 행위부터 보존은 시작된다. 잿더미를 보존해야 타올랐던 불을 기억할 수 있다. 사라진 시간인 잿더미의 절망이 현재의 시간인 불의 희망이 된다. 절망적인 보존으로부터 희망적인 창조가 시작된다. 단지 불을 켰을 때 나오는 것이 희망일지 절망일지는 빠찡코처럼 랜덤일 뿐이다.
시인은 빠찡코 기계 앞에 앉아 빠찡코를 돌린다. 희망이 나올지 절망이 나올지 모르나 계속 돌린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한다. 어린왕자의 5번째 행성에 사는 불을 켜고 끄는 사람같다. 어린왕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있느냐란 질문에 나의 할 일은 그저 불을 켜고 불을 끄는 일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생각을 끝낸다. 모닥불이 꺼진다.
빠찡코 -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지는 않고 죽고 싶은 마음이 강을 찾지는 않고 죽고 싶은 마음이 빠찡코를 찾는다 죽고 싶은 마음들이 빠찡코에 모인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보며 아무도 없는 거리를 지나가면 시인 두엇쯤이 앉아 있는 빠찡코가 보인다
쭉 뻗은 그 손에서 시에 대한 각서를 쓰지는 말고 쭉 뻗은 그 손으로 목매다는 밧줄을 묶지는 말고 레버를 당긴다 그것이 스툴에 앉아 있는 시인들의 마음이다
죽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빠찡코는 만석 죽고 싶은 마음들이 흩어져 마음들이 죽어도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지는 않고 빠찡코 이제 그만 빠찡코 너무 좋아